키스의 이유
너랑 지독하게 엮이고 싶어서 그랬어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 애는 내게 깍지 끼는 게 좋은지 그냥 잡는 게 좋은지를 물어봤다. 그간 만났던 애들이 연애하기로 한 날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나를 인형처럼 주물럭대던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건강한 연애에 익숙지 않은 나는 그 애의 건전함이 못내 이상하게 느껴졌다. 손잡는 이상의 스킨십이 없자 내 불안정한 사고가 또 급발진을 했다. 난 그 애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스킨십을 피하나’라고 생각했다가 ‘스킨십을 원래 싫어하는 스타일인가’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얘는 성욕이 없나 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지만 그때의 나는 한없이 진지했다. 왜냐하면 그 애의 귀여운 입술에 뽀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슨 맛과 향이 날지도 궁금했고 겸사겸사 그 애랑 좀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성욕이 없는 남자애를 만나본 적이 없다 보니 얘랑 어떻게 뽀뽀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스킨십에 관심도 없는 애를 두고 하는 생각들이 문란한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뽀뽀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질 않았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심스러웠지만 나는 얘를 좀 찔러보기로 했다. 난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 종일 생각한 그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저 되게 솔직하고 개방적이에요. 거의 뭐 아메리칸 스타일이랄까?"
밤 산책 중에 하긴 뜬금없이 발칙한 말이었다. 그러나 뽀뽀를 위해서였기에 저질스러운 뻥을 쳤어도 양심의 가책과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별 소득은 없었다. 그 애가 흥미 없다는 말투로 ‘네에’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가 술주정 부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취한 건 맞지만 주정이 아니었다. 나는 괜한 오기를 부리고 싶어졌다.
"진짜예요. 전 남자친구랑 하는 건 다 좋아요."
나는 일부러 '다'에 힘을 주었다. 모든 것, 전부, 에브리띵! 그 애는 알아들은 듯한 묘한 표정을 짓다가 곧 ‘네에, 기대할게요’ 하고 웃어넘겼다. 영양가 없는 대화가 길어지자 나는 조급해졌다. 술기운을 빌어 용감해진 내가 냅다 그 애 가슴에 손을 얹고 다가갔다. 원래대로라면 뺨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그 애는 키가 180이 훨씬 넘었고 나는 160이 조금 안 됐다. 까치발을 들었어도 키가 한참 닿질 않아 내 입술이 걔 목에 닿고 말았다. 볼에 뽀뽀하고 도망가면 귀여워 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일주일도 안 된 사이에 벌써 목에 키스라니! 몹시 문란한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급작스레 소심해져 그 애 눈치를 봤다. 이게 아닌데, 이건 너무 빠른데, 언젠가 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워도 좋지만 중간 과정 없이 애무부터 해버리기란 좀 그런데. 정신이 차려지며 얼굴이 홧홧 해진 나는 어디로든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애가 불이 붙은 채 맹렬하게 키스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줏대 없이 또 좋아서 거의 걔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그 애에게도 성욕이 있는 것이 다행인 건지 아니면 머쓱할 뻔한 내 상황을 구제해 준 것이 다행인 건지. 어쨌든 그 애와 키스한 그 순간은 여러모로 내게 좋은 일이었다. 그 뒤 내 바람대로 우리는 자주 껴안고 뽀뽀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그 애에게 고백받던 날에 나는 거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울하고 불운한 연애에 익숙한 나로 인해 그 애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망가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얼결에 사귀게 되었지만 그 애가 포착한 내 예쁜 모습이 사실은 다 허상이고 가면이었다는 것을 들킬까 내내 무서웠다. 하지만 키스할 때면 그런 생각을 할 정신이 아니게 된다. 그냥 그 애에게 몰입되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 그래서 자꾸 뽀뽀하고 싶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나쁜 생각을 하지도 못하게, 현재의 황홀한 감각에만 집중하게끔, 그래서 우리에겐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는 듯이.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그 애와 모텔에 가게 되었다. 둘 다 옷을 반 정도 벗고 막 뭔가를 하려는 때였는데 갑자기 그 애가 스톱을 외쳤다. 그러더니 입이 대빨 나와서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엄청 대단한 것처럼 말하더니 실상 스킨십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을 기대했는데 실망했다고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너랑 좀 지독하게 엮이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할지, 야릇한 사정이 있어서 뻥쳤지만 별로 미안하진 않다고 뻔뻔하게 나갈지 순간 고민되었다. 그동안에도 뚱한 얼굴과 태도를 유지하는 그 애가 너무 웃기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귀엽고 말랑한 입술에 진하게 뽀뽀하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시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