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쌤이 떠났다. 어쩌면 어제. 정확하지 않다. 뿌리처럼 기다란 두 다리를 꼰 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독서를 하던 그가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이다. 휴무 후 돌아온 방엔 채 정리하지 못한 짐이 한가득이었다. 떠난 그로부터 메시지가 몇 통 와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어요.
돌아오지 않으면 내 짐은 수가 가져요.
수가 불행하지 않기를.
아주 짧은 작별 인사였다. 연쌤을 그리워할 새도 없이 연쌤의 짐을 정리하러 사람이 왔다. 내 책상에 연쌤의 머리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화선 머리끈이었다. 아마 내 것인 줄 알고 따로 둔 듯했다. 나는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연쌤의 머리끈으로 내 머리를 다시 정돈해 묶었다.
연쌤은 키가 컸다. 손과 발도 키만큼 컸다. 누르는 힘도 셌다. 마사지사로서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마사지사치곤 꼼꼼하다던가, 야무진 구석이 없어 어딘가 몹시 못 미더운 사람이었다. 나는 못 미더운 연쌤이 좋았다. 그를 좋아한 첫 번째 이유는 나 또한 못 미더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도 나와 같은 이유로 나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청소하자는 룰도 팀장님께 혼날까 봐 정한 것이었다. 게으름의 기준치가 엇비슷한 우리에게 트러블이 일어날 리 없었다. 일이 없을 땐 함께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었다. 각자 모자란 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숨쉬기 운동을 했다. 비생산적이어서 더욱 좋은 시간이었다.
관리실 규정으로 우린 언제나 머리를 묶고 있어야 했다. 나는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긴 단발이었고 그는 어깨 위로 오는 짧은 단발이었다. 그의 애매한 길이의 머리카락은 자주 끈에서 삐죽삐죽 빠져나왔다. 묶는 이유가 없어 보일 만큼 자주 산발이 되었다. 깔끔해 보이지 않았기에 자주 혼이 났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고쳐 묶어도 원래 모양대로 돌아갔으니까. 그에겐 산발인 머리가 원래 상태인 것이다. 그의 자유분방함을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실은 그가 늘 노브라로 다닌다는 사실을. 젖꼭지 패치를 붙이지만 이마저도 답답해한다는 것을. 내가 그를 따라 함께 노브라로 다닌다는 것까지 안다면? 분명 온갖 톤의 비명이 난무할 것이다.
어느 날 그의 몸을 빌려 마사지 연습을 하고 있었다. 통증에 취약한 그가 연습 내내 움찔움찔하는 통에 나의 연습 진도가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집중할 수 없다는 핑곗김에 옆에 따라 누웠다. 머리가 부숭부숭 솟은 채 잠에 들락 말락 한 연쌤은 야자수 나무처럼 보였다.
살짝 들린 옷 사이로 타투 흔적이 있었다. 파랗고 희미했다.
“쌤, 이거 어디서 한 거예요? 나비네요.”
그는 잠이 흠뻑 묻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태국 뒷골목에서. 한국 돈으로 이만 원 주고 했어요.”
“어쩐지. 다 번져있네요.”
“술 먹고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어떤 술이었을까. 무슨 맛이 나서 찌르는 통증을 참아가며 타투를 받게 된 걸까. 술에 취한 연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고롱고롱 코를 골기 시작한 그를 깨워 묻기에 그다지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코골이가 은근하게 좋았다. 나는 야자수 나무 아래서 선탠을 즐기듯이 배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깜빡 잠든 나와 연쌤을 깨운 건 팀장님이었다. 또 혼이 났다.
그래서 어디로 가실 거예요?
다시 제주도로 가려고요. 스쿠터도 아직 거기 있으니 제주도를 한 바퀴 좀 돌까 해요. 일은 다시 구하면 되고요.
대전에 오기 전에 원주에 있었댔나, 대구에 있었댔나, 구미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이곳 저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살았다고 하기에 기간이 전부 짧거나 애매했다. 그냥 거쳐온 것이다. 다음 장소로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갑작스레 제주도로 간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어쩌면 이상한 건 나일지도 모른다. 벗어나고 싶은 공간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까.
연쌤이 긴 몸을 스쿠터에 싣고 제주도의 깊은 곳까지 휘적이며 다니는 상상을 해봤다. 그의 부숭부숭한 단발이 제주의 무신경한 바람결을 따라 훌훌 댈 것이다. 스쿠터를 타다 졸리면 아무데서나 누워 낮잠을 자거나,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사람이니까.
며칠 뒤 그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히피 스타일의 원피스와 블라우스 그리고 책 한 권. 곧 잘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잘 우는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내 불행을 염려하면서도 곁에 남아줄 순 없었을 테니까.
나는 그 선물을 서랍에 정리해 넣었다. 그리고 그가 놓고 간 짐도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가 독서할 때 사용하던 스탠드와 소설책 두어 권을 제외하곤 모두 히피 스타일의 옷가지뿐이었다. 낡은 옷가지들이 오랜 주인을 잃고 널브러져 있는 것이 딱해 차라리 버리기로 했다. 내가 입기에 어울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결국 떠난 것이다. 어쩌면 금방 떠날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린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대전에 오지 않을 테고, 나는 대전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철저히도 이방인이었던 그를 나는 왜 이리 깊게 사랑하게 된 걸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왜 자꾸 나를 떠나가는 걸까. 그 대신 곁에 남은 물건들을 쓰다듬으며 나는 오래도록 슬퍼했다.
2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