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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린 Mar 22. 2023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나도 이런 시를 쓰고 싶다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 먹는 사과 말이다. 그래서 읽은 시. 사과를 주제로 한 시들은 대게 고 스티븐잡스 형님의 철학처럼 난해했었는데, 이 시는 동시처럼 잘 읽혔다.


흑백 TV  같은 시가 아닌, 이코노 칼라텔레비전처럼 시. 청. 후. 촉각을 총 동원하고 있다.


1~4행까지는 청각, 5~8행까지는 촉각, 9~10행까지는 후각, 그 이후는 시각적 묘사를 동원한다.

또한 장면과 장면 사물과 사물이 이야기 속 상상력으로 뻗어나간다. 재미있다.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지난 2001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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