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알고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 떨고 있니?"
초등학생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대사가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생각났다. 비행기를 타고나니 아이들과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70일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와 11살 큰아들, 7살 작은 아들 이렇게 셋이서 두 달 넘게 캐나다에 머무는 일정이었다. 아이들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준비한 여행이었지만,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두려움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버렸다.
지난 겨울 캐나다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이 다닐 캠프를 등록하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할 때에도 우리의 여행이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짐을 싸면서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여행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의 두려운 감각에 불을 지핀 것은 아내였다. 공항에서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면서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내의 눈물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구본형 선생님께서 그의 저서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에서 “두려움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으로만 증폭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딱 그런 꼴이었다. 두렵다는 감정에서 시작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두려운 감정이 커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두려움은 자가증식을 하는 것인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나의 두려운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작별 인사를 하다 눈물을 보인 엄마의 모습에 잠깐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새로운 여행을 시작부터 즐기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비행기 모니터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기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았다. 애비의 두려운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여행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이 한편으로 야속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나의 두려움에 대해서 하나씩 정리해보기로 했다. 도대체 나는 아이들과 떠나기 전부터 무엇 때문에 떨고 있을까? 하나씩 살펴보면 그래도 두려운 감정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었다.
우선 우리의 목적지인 캐나다 위니펙까지의 긴 여정이 걱정이다. 아이들은 이미 장거리 비행에 최적화 되어 있기는 하다. 여행을 자주 다닌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비행 자체가 걱정되는 건 아니다. 문제는 환승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위니펙이라는 캐나다 중부에 있는 도시다. 직항은 없고, 밴쿠버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밴쿠버의 환승은 다소 복잡하다고 한다. 밴쿠버에서 내려서 입국 심사를 다 받고, 짐을 다 찾은 후에 다시 짐을 부쳐야 한다. 게다가 밴쿠버에는 한국 시간으로 새벽 시간에 도착한다. 아이들이 한참 졸릴 때다. 아이 둘을 데리고 게다가 많은 짐을 갖고 캐나다 환승 구간을 통과할 수 있을지, 그리고 위니펙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 지, 그 걱정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70일 동안 아이들과 이곳에서 잘 머무를 수 있을지도 걱정된다. 가장 큰 문제는 먹는 문제다. 아이들의 삼시세끼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나는 아내의 도움 없이는 요리를 잘 못한다. 몇 번의 요리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아내에게 SOS를 쳐야 했다. 요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나로서, 아이들의 식사를 잘 책임질 수 있을까 걱정된다. 물론 오기 전 아내와 장모님께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에 대한 레시피를 열심히 전수 받았다. 문제는 실전경험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내가 만드는 음식을 잘 먹었으면, 나는 음식을 잘 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의사소통도 문제다. 아이들은 영어를 전혀 못한다. 아이들이 영어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즐겨보자고 한 여행에서 아이들이 괜히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두렵다.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이 나에게 별다른 의미를 남기지 못할까 두렵다. 아이들과 좋은 경험을 해보겠다는 취지도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통해 나도 아이들도 한 뼘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나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좋은 기회가, 혹시나 힘들었던 기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닐는지 걱정이 된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에만 매몰되지 않고 나를 돌이켜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데, 잘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 마음 속의 다양한 두려움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 둘씩 보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감정이 사그라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선 하나의 두려움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했다. 다른 걱정은 잠시 묻어두고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는 것만 생각했다.
위니펙까지 가는 첫번째 관문인 밴쿠버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잘 움직여 주었다. 입국심사도 쉽게 통과했다. 짐을 찾고 다시 짐을 부칠 때에는 아이들이 카트를 끌어주면서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새벽시간대라 걱정이 많았지만 아이들은 씩씩했다. 환승도 문제 없이 잘 할 수 있었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다양한 현인들을 만난 작가의 경험을 정리한, 팀 페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에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 중에 인상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캐롤라인이라는 여성 소방관이 두려움을 극복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230미터의 금문교에 올라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둥근 가로 바(Bar)위를 걷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두려운 감정을 이겨내는 그녀의 이야기가 밴쿠버 공항에서 갑자기 생각났다.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은 기적 같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두 걸음, 세 걸음쯤 걷고 나자 그냥 보통 평지를 걷는 것과 똑 같은 느낌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뚜려움에서 용기까지는 두 세 걸음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타이탄의 도구들, p.168>”
캐롤라인이라는 여성 소방관처럼 높은 금문교 위는 아니었지만,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그래도 괜찮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밴쿠버에서 환승을 기다리면서 나는 생각보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들이 별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이 두렵기는 하지만 하다 보면 어려운 일들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