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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아빠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그렇게 길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나요?

by 최호진


밴쿠버를 거쳐 캐나다 위니펙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씻고 나니 어느새 저녁 10시가 되었다. 7월의 위니펙은 해가 길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밖이 환했다. 시계를 보고 나서야 밤 10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랴부랴 잠을 청했고, 아이들과 나는 쉬이 잠이 들었다. 긴 여정으로 피곤했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새벽에 깨야 했다. 아이들은 새벽 2시에 일어나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를 귀찮게 했다. 바뀐 시차 때문에 첫날밤 고생을 했다. 70일간의 캐나다 일정, 첫날이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어떻게 70일 동안 아이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었어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도, 하는 중에도 그리고 다녀와서도 사람들은 내게 아이들과의 여행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종종 물었다. 질문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나는 70일이라는 긴 기간을 어떻게 뺄 수 있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과 엄마 없이 갈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었냐는 것이었다.

70일간의 긴 기간 동안 아이들과 여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의 휴직이 큰 역할을 했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휴직이었지만 휴직을 했기에 아이들과 평생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2018년 12월 31일 오후 5시 30분, 종무식을 앞둔 시점에 부장에게 휴직 승인을 받았다. 부장의 마음이 바뀔까 봐 후다닥 휴직원을 인사부에 제출했다 15년차 직장인으로 갑작스런 휴직이었다.

회사에서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기회 영역에서 인정도 받았다. 혼자만의 생각이긴 했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몇 년 안에 승진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미루다 보면 그냥 월급쟁이로 그렇게 쭉 살아갈 것 같았다. 직장인으로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좀 더 달라지고 싶은 마음에 휴직을 선택했다.


2005년 1월 3일, 나는 국내의 한 은행에 취직했다. 하지만 나의 꿈은 은행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나운서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아 왔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게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적성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었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견디게 했던 것도 아나운서라는 꿈의 덕이 컸다. 하지만 나는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준비가 제대로 안된 탓이 컸다. 오랫동안 꿈을 간직하며 살았지만 방송사에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철저히 분석하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아나운서라는 꿈을 곧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간직한 꿈이 무색하리만큼 말이다.

웃긴 이야기지만 꿈을 위해 재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나름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터라 한 해를 백수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1년 쉬는 것이 자칫 인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10년 넘게 간직한 꿈을 포기하고 곧장 여러 회사에 지원했고 운이 좋게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은행에 취직해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다시 준비하면 되겠거니 싶기도 했다. 무엇에 홀린듯이 그렇게 후다닥 결정을 내리고 말았었다.

생각보다 은행원으로서의 삶이 나쁘지 않았다. 사회 생활을 처음 하면서 좋은 선배도 만날 수 있었고 일하는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카드사로 옮겨 가서 광고라는 일을 접하면서 한동안 즐겁게 일하기도 했다. 어느새 아나운서라는 꿈은 서서히 잊혀졌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한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은 회사 밖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커져갔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10년 동안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해 돌이켜 보게 되었다. 우연히 신정철 작가가 쓴 <메모습관의 힘> 서문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나는 어떤지 스스로를 바라봤다. 직장생활을 10년 넘게 했지만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 이외에 글이라고는 거의 써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만한 나만의 콘텐츠도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을까? 남들이 저렇게 열심히 사는 동안 나는 지금까지 뭐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신정철, 메모습관의 힘 中>


나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동안 내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남들이 자기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월급쟁이로 살아왔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이 괴로웠다. 회사에 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사람같았다. 메모습관을 만들며 자신감을 갖게 된 책의 작가가 부럽기만 했다.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당당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횟수가 잦아졌다.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이들뿐이라고 착각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서 흠칫 놀라곤 했다.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상황 같았다.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고 이 때 떠오른 게 휴직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나의 휴직을 적극 환영했다. 그동안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 괴로워하던 나를 쭉 지켜봤던 아내는, 1년 반 동안 나를 위해 살아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렇게 나는 휴직을 선택했다. 과감한 도전을 위해 퇴사를 선택하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퇴사하기에는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끝까지 과감하지 못했지만 보험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기 위해 휴직을 시작했다. 휴직을 하며 무엇을 해보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길이 보일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휴직을 하면서 목표는 하나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당당한 남편, 아빠가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가고 차근차근 밟아가는 시간을 휴직이라는 계기를 통해 만들어 가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하나의 생각이 결국 긴 여행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다소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아이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화만 내는 아빠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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