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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Nov 20. 2019

[휴직일기] To-do 리스트를 써야 편안해진다.

나는 할일이 많아야 편안해지는 사람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


 올해 4월, 벚꽃을 실컷 보고 싶어, 경주 마라톤 대회에 다녀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경주에서 나는 신나게 달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마라톤 대회에서 벚꽃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달리기에 집중한 나머지 달리는 내내 회색빛 아스팔트만 바라봤다. 좋은 기록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여유가 없었다.


 최근 춘천 마라톤 대회에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 사진을 보면서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경치의 사진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춘천에서도 과연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좋은 경치가 아무리 주변에 있어도 나는 오로지 달리기에 집중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다.


 얼마전부터 아등바등 사는 나의 삶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휴직을 하고 나서 더 바쁘게 지냈다. 열심히 하면 뭐라도 나올 것 같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결과물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 힘들게 살지 말라며 여유를 가져 보라고 나에게 충고도 해 주었다. 


 여유가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쉬면서 노는 것도 내 삶에 도움이 될거라 마음 먹었다.  때마침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힘들게 산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여유롭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씩 게을러졌다. 매일 해야 한다는 것들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여유로운 삶은 아닌듯 했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게으른 여행, 그런데 불안했다.


 혼자만의 제주여행을 계획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 보고 싶었다.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뭔가 실마리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잡은 여행의 콘셉이 "게으름"이었다. 게으르게 며칠을 지내면 뭔가가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동안 게으르게 잘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셋째날 아침이었다. 그날도 게으르게 하루를 시작했다. 느즈막히 일어나 침대에서 TV를 켰다.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응답하라 1988>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열심히 시청했다. 한참을 빠져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내가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드라마를 보는 게 나쁘지 않았는데, 그런 나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시간을 허투로 쓰는 것 같아 불편했다. 갑자기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부랴 부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달리기를 하며, 불편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숙소 밖으로 나오자마자 파란 바다가 보였다. 바닷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파란 바다를 보니 불편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변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에 달리는 게 꽤나 힘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바람을 헤치고 달리는데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불현듯 TV를 보던 내가 왜 불편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쁘게 살아야 편안한 사람이었구나.



 살면서 항상 바쁘게 지내왔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바빴다. 그러다보니 여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여유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에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그냥 뭐라도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바닷 바람도 불고, 달리느라 몸도 힘들었지만 나의 불편함과 마주한 나는 마음만은 그 어느때보다도 가벼웠다. 내가 왜 불편한 지 알 수 있었으니까.


To-do list를 쭉 적고나니 편안해졌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부터 다시 바로 잡았다. 그동안 30분, 1시간씩 미뤄서 늦잠을 자던 패턴을 다시 5시로 맞췄다. 그리고 매일 해야 할 일을 수첩에 빼곡히 적기 시작했다. 두 달 넘게 여유를 부린다며 수첩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수첩에 해야 할 일을 빼곡히 적으니 뭔가 많은 일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일을 했든, 안했든 To-do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몸이 힘들어도 끊임없이 뭘 해야 나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아주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지만, 나는 여유롭게 사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여유를 부린다고 있었던 몇 주 동안 여유를 부린 게 아니라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과 여유를 부리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한다고 여유가 생기는 게 아니라, 많은 것을 하면서 중간에 쉬는 것이 여유라는 것을 그 때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To-do list가 고마웠다. 그것을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해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시 내가 살던 방식으로 돌아온 것 같아 편안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살던 방식대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맞을 듯 싶다.


여유는 개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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