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빠르게 회복했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목요일, 아이는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퇴원 절차는 의외로 간단했다. 담당의사가 아이 상태를 살펴보더니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간호사가 퇴원 후 주의사항을 간단히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짐을 싸서 집으로 가면 끝이었다. 약은 동네 약국에 가서 받으면 되었고, 병원비도 이미 2000불을 냈기에 나중에 정산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싱숭생숭했다. 나의 바람대로 목요일에 퇴원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아이가 완벽히 회복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우기는 바람에 너무 일찍 퇴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내가 자처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퇴원을 하면서 불안하고 찜찜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우연히 만났던 한국인이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수술을 한 다음날 오후의 일이었다. 아이가 회복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병원비가 생각보다 적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상당히 편안해졌다. 몸이 편안해지니 단게 당겼다. 갑자기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졌다. 병실에 아이를 놔두고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찾아갔다. 다디 단 아이스바닐라라떼를 시켰다. 가만히 서서 커피를 기다리는데 한국인 바리스타가 한국인이냐며 알은체를 했다. 나도 한국인 바리스타가 반가웠다. 바리스타에게 아들이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고 이야기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인 바리스타는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한국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이야기 해 주었다.
얼마 전 이곳에 사는 한국인 어린이가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했는데, 수술 후에도 아이는 계속 아파해 했다고 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배가 아팠던 아이는 비행기 안에서도 꽤나 고생을 했다고 했다. 한국의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다시 받았는데 한국에서 수술을 했던 의사는 아이의 배를 "까보더니" 깜짝 놀라 한마디 했다고 했다.
"도대체 캐나다에서 어떻게 수술했길래 아이의 배를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다행히 아이는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괜찮아졌다고 했지만 한국인 교민들 사이에서는 이곳 병원을 잘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맹장 수술이 복잡한 수술도 아닌데, 그런 수술 때문에 아이가 한국 병원에 가서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우리 아이도 수술이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밀려왔다.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취지였겠지만, 나에게 괜한 이야기를 한 바리스타가 얄미웠다. 그 이야기를 잊으려고 해도 자꾸 머릿속을 멤도는 기분이었다.
찜찜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병원의 우울한 공기에서 벗어나, 누나네 집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좋았다. 아이도 답답한 병원에서 나와 즐거워했다. 그리고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했다. 퇴원 후 다음날에는 집 앞 마당에서 일광욕도 하고, 산책도 하며 기운을 냈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바리스타가 들려준 이야기도 있었고, 병원에서 2차 감염을 조심하라고 했던 터라 아이 상태를 수시로 체크해야 했다.
그날 저녁 아이 상태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되니 간만에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아이가 입원한 며칠 동안 달리기를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30분 정도 가볍게 뛰고 오면 상쾌할 것 같았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이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아이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이 머리를 만져보니 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병원에서 열이 나는 것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겁이 덜컥 났다. 부랴부랴 체온계로 열을 재 보았다. 37도가 넘었다. 가벼운 미열이었다. 걱정은 됐지만 그렇다고 병원에 연락하거나 응급실에 갈 상황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38도가 넘으면 응급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우선은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도 괜찮다고 했다. 기왕 옷까지 갈아입었으니 어여 달리고 오라며, 나를 떠밀기까지했다. 걱정은 됐지만 아이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하고 집밖으로 나와 천천히 달렸다.
아이가 나가라고 해서 나왔지만 제대로 뛸 수 없었다. 뛰는 내내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너무 빨리 퇴원한 것이 문제였을까? 소문의 아이처럼 우리 아이 수술도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지? 온갖 나쁜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눈물도 나왔다.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우리 아들에게 더이상 별 문제가 없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다. 종교도 없는 자식이 말이다.
후다닥 동네 한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아이 상태부터 살펴봤다. 아이는 괜찮았다. 열도 더이상 오르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고 또 모든 신께 감사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이 상태를 살폈다. 체온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간단히 파티를 했다. 사실 이날은 아들의 생일날이었다. 정신이 없어 미역국도 못끓였는데 누나가 미역국도 끓여주고 케이크도 준비해준 덕분에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파티를 할 수 있었다. 큰 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아들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동생도 큰 소히로 형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아들이 캐나다에서 남은 일정을 잘 소화하고 즐거운 경험을 더 많이 쌓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생일 축하해 아들! 고맙고 사랑한다”
여전히 힘들어 하긴 했지만 아들은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배가 불편해 힘들어 했지만, 나는 그럴수록 아이를 더 걷게 했다. 그래야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월요일부터는 캠프에도 갔다. 사실 캠프에 보내도 되나 고민이 됐다. 캠프에서 운동량도 많아 괜히 아이 몸에 무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캠프에 너무 가고 싶어했다. 집에서 나와 둘이 있는 것보다는 캠프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아픈 것을 잊는 방법이겠거니 싶었다. 아들에게도 아프면 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캠프 선생님께도 상황을 말씀드리고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렇게 아이를 캠프에 보냈다.
캠프에 아이를 보낸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아이는 캠프에서 있는 동안 아픈 것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고 했다. 많이 걸어야 해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놀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캠프에서 오히려 기력을 회복한 듯 했다. 아이가 캠프에 간 덕분에 나도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병원에 가서 남은 병원비도 정산도 했다.
퇴원하고 일주일 조금 넘게 지나 금요일 담당 의사를 다시 만났다.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이 상태가 어떤지 체크를 해야 불안함이 없어질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 배를 여기 저기 만져보며 아이 상태를 체크했다.
"거의 다 나았습니다. 이제 병원에 안와도 돼요. 항생제도 지금 먹는 것만 먹고 더 안먹어도 됩니다."
100% 완벽하게 나은 건 아니지만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수영장에서 마음껏 놀아도 된다고 했다. 일상 생활에서 크게 주의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각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신이 났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며칠동안의 근심과 걱정이 눈녹듯 사라졌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심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 버텨준 아들이 너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