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도 한 번 써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얼마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읽었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주말 오후 우연히 책장에 꽂힌 특별판이 눈에 띄어 다시 보게 됐다. 책은 역시나 재미 있었다. 추리소설을 주로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답지 않은 책은 판타지가 결합된 "인간적"인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흥미로웠다. 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후다닥 소화할 수 있었다.
책은 나미야 잡화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장난 삼아 시작한 고민 상담소가 사람들의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는 곳이 되면서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사람들의 고민에 답장을 보낸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보면서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 한다.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은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나미야잡화점의 기적> p.167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앞에서 고민을 늘어 놓았던 몇 사람이 생각났다.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면 "답정너"인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이미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정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며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분들이 떠올랐다. 그분들이 나의 입에서 바랐던 것은 신박한 해결책이 아니라 온전한 지지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생각해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내 고민을 털어 놓을 때 비슷한 마음이기도 했고.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으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 속의 할아버지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응원했다. 그런 마음이 전달되었기에 사람들이 나미야 잡화점을 찾고 그 속에서 기적을 발견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 읽어보니 내 답장이 도움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본인들의 마음가짐이 좋았기 때문이야. 스스로 착실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 내 답장도 소용이 없었겠지
<나미야잡화점의 기적> p.199
매번 사람들을 죽이고, 범인을 추적하던 히가시노의 다른 작품과 확연히 달랐다. 덕분에 봄처럼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 듯 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이런 저런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읽고, 아내가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온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도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왜 아내가 나에게 <대도시의 사랑법>을 가져다 줬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퀴어 소설도 읽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권의 소설을 도서관에서 더 빌렸다. 그동안 자기계발서만 읽던 내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1. 소설은 놀고 있는 나에게 죄책감을 지워줬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독서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나에게 의무감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얻는 것도 많았지만, 동시에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었다. 특히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는 그런 압박이 더 컸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서 일상에서 적용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냥 편하게 즐기며 읽을 수 있었다. 몰입해 소설을 읽을 때에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푹 빠질 수 있었다. 나름 책을 읽으며 나를 속박했던 의무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냥 즐겁게 노는 것이 독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소설을 읽는 것은 노는 것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그렇게 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분명 나는 유희로서 책을 읽고 있었지만 괜히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활자로 된 글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드라마를 몰아서 볼 때에 가졌던 나 스스로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들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는 내게는 나름 소설은 죄책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였다.
2. 허구라서 더 적나라하다.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몇몇의 현실 속 인물을 그려볼 수 있었다. 분명 소설 속 인물과 상황은 허구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애자일도 잘 모르면서 그것을 강조했던 회사의 임원들도 생각났다. 포인트로 월급을 줬다는 이야기에는 한 회사의 사장이 그런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도 들었다.
소설 속의 허구가 진짜 내 주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제 일이라면 까발리지 못할 것을 허구라는 미명하에 제대로 까발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읽을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일본은행원의 모습이었지만 우리 나라 은행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나름 통쾌했다. 아마 이것을 에세이로 썼다면 제대로 까발릴 수 없었고, 통쾌한 감정을 주진 못했을 듯 싶다.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현실적인 아이러니가 소설을 읽는 내내 내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3. 글쓰기도 배운다.
소설을 즐긴다고는 했지만. 본능적으로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내 한계이기도 했다.
내가 찾은 의미는 글쓰기였다. 몇권의 소설을 읽으며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마지막에 읽으면서 등장인물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탄성을 질렀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처음부터 물음표를 갖고 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과연 주인공이 남자인건지, 여자인건지 도저히 구분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몇 줄만에 사람의 시선을 끄는 글쓰기를 어떻게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읽다보면서 어떻게 하면 독자의 시선을 계속 끌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 그게 내 글쓰기에 당장 어떻게 도움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서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리 써야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지난 12주 동안 신정철 작가의 GC Club이라는 온라인 모임에 참여했다. 퍼스널 브랜딩을 위해 나를 알리고, 나의 컨텐츠를 쌓아가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열심히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배운 것도 많았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분 중에 금융권에서 근무하는 분도 있었다. 항상 이런 모임에서 금융권에 근무하시는 사람을 볼 때마다 동질감을 느꼈다. 비슷한 환경에 처했다는 생각에 더 응원하게 됐다. 그분은 이번 모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셨다. 바로 짧은 소설을 써본 것이다.
읽는 내내 대단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가 쓴 소설 또한 책으로 봤던 작가들의 소설만큼이나 나를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일반 직장인이 자기의 경험으로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했다. 그의 도전을 보면서 소설을 쓴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을 허구라는 미명하에 더 잘 까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을 쓰다 보면 그동안 감춰왔던 진심을 더 잘 드러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됐다 프립이라는 곳에서 소설 <회색인간>의 저자이신 김동식 작가가 네 번에 걸쳐 진행하는 초단편 소설쓰기 모임을 알게 된 것. 이 모임에서 참여하면서 소설쓰기에 대해 배워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진짜 소설을 써보겠다는 마음이기 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해 보면 재미날 것 같다는 생각에 신청하게 됐다.
언젠가 브런치에서 나만의 소설을 쓰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