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으니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사회적 거리 유지기간이라 이동이 다소 부담되긴 했지만 지난 3월 어머니 생신 때도 찾아뵙지도 못한데다 지금이 아니면 한동안 부모님께 가지 않을 것 같아 조심하며 다녀왔다. 가는 길에 휴게소도 안들르고 원스탑으로 차를 몰았고, 부모님이 계시는 전주에 가서도 식당에서 식사는 가급적 삼갔다. 전주는 코로나 환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나름의 청정구역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
야외활동은 괜찮을 듯 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순창에 있는 강천산에 다녀왔다. 매년 이맘 때쯤 들르는 산이었다. 아이들이 가기에 적당한 산인데다, 중간에 "흔들다리"도 있어 스릴을 즐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선선한 봄바람까지 어우러져 산책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간만에 콧바람에 흥이 났다. 아이들은 조금 힘들어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순창에 있는 강천산에 들른 것은 꼭 산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근처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찾아 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내가 왔다 갔다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보고 계실지는 알 수 없지만, 인사를 드리는 동안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어릴적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새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웠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 아이들에게 하듯이 할아버지, 할머니도 살아계셨을 적 날 참 예뻐하셨는데...
간만에 하는 나들이라 그런지 너무나 평화로웠다. 모든 게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편안하고 즐거운 나들이었다. 아이들도 간만에 뵙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시간을 즐겼다. 부모님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내외와 손주녀석들과의 나들이가 꽤나 즐거우신 듯 했다. 부모님의 품이 이토록 따뜻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나들이었다.
최인철 교수가 강조한 "쾌족"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쾌족은 글자 그대로 '기분이 상쾌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심리상태를 지칭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행복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굿 라이프 중에서>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금의 소소한 순간이 바로 쾌족의 순간이고 행복의 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천산에 오를 때였다. 아내와 아버지께서 앞장을 서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뒤에서 따라갈 때 아버지와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눴다. 그리고 서울에 오는 길 아내로부터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호진이 회사는 뭔 휴가가 그리 많냐? 회사 그만 둔 건 아닌가 걱정했다.
작년 여름 아이들과 캐나다에 다녀오면서 나는 부모님께 안식년 휴가를 석 달 얻어서 길게 캐나다 여행을 갈 수 있다고 둘러댔다. 괜히 휴직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가 부모님이 걱정하실 게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게 자꾸 걱정이 되신 듯 했다. 휴가는 거짓이고 회사를 그만 둔 건 아닌가 싶었나 보다. 아들에게 이야기 하면 짜증을 낼 게 뻔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애먼 며느리에게 하소연을 하신 듯 했다. 다행히 지금은 아들의 상태에 대해 의심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모님께 나의 휴직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다는데, 부모님께서는 지금의 내 상황을 모르시는 게 두 분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듯 싶었다. 부모님은 항상 자식을 걱정하시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시니 말이다.
이제는 부모님께 휴직에 대해 고백해도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도 했었는데, 덕분에 다시 그 마음을 쏙 집어 넣을 수 있었다.
"내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시며 장렬히 전사하신 이순신 장군같은 비장한 마음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 휴직을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지내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이미 아시고 있는데 내게 모르는 체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바로 부모님의 행복을 지켜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님에게는 아들 내외가 착실히 회사 다니면서 아이들 잘 키우며 사는 게 제일일테니.
애써 변명해보련다. 이게 바로 부모님께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라고 말이다. 그 속에서 나의 행복도 찾고 부모님의 행복도 지켜드리려는 일이라고 말이다. 굳이 사실을 들춰내어 서로의 평화를 깨뜨릴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