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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Apr 06. 2019

경주에 가서 10km를 뛰고 왔습니다.

경주는 내게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48분 14초


4월 6일 토요일 아침,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 10km 부문에 참가했다. 작년 11월에 나가고 생애 두 번째 마라톤 대회였다.

긴장됐다. 간만에 뛰는 마라톤이기도 했거니와 2월부터 꾸준히 연습한 결과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떨렸다.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도전을 위해 두 달여를 연습했고,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서 더 긴장됐다.


“40분대에 들어와 보자”


올해 초 만들었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처음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때만 해도 할 수 있을까 걱정됐었다. 작년에 50분대에 들어올 때도 겨우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2월부터 매일 달리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몸이 장거리 달리기에 적응하고 있었다. 목표를 세우고 연습을 하니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더 긴장했다. 뭔가 나의 두 달여의 노력을 테스트받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드니 욕심이 생겼나 보다. 같이 온 사람들을 내팽겨두고 나는 나 혼자만의 기록을 위해서 그렇게 달렸다.


힘든 레이스였다.

풀코스 선수 및 하프코스 선수까지 출발한 후 10km 참가자들이 출발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스타트 라인을 넘어섰다. 너무 사람이 많다 보니 처음엔 달리는 게 힘들었다. 걷는 사람과 천천히 뛰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뛰어다녀야 했다. 힘은 힘대로 쓰고 속도는 속도대로 나지 않았다. 5분에 1km씩은 가야 하는데 첫 5분은 너무 늦었다.


1km가 지나면서 나만의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천천히 뛰는 사람들을 이미 제친 상태라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었다. 첫 5분을 만회하기 위해서 조금 힘을 냈다. 오버 페이스는 아닐까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도 몸이 잘 따라줬다.


문제는 5km 구간을 지나고 나서 발생했다. 가파른 언덕길이 보였다. 한강에서 달릴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언덕이었다.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40분대의 목표는 다음 마라톤으로 넘겨야 하나 고민도 됐다. 긴장이 됐는지 갑자기 소변도 마려 오는 것 같았다. 이미 출발 전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겨우 겨우 올라갔다. 걷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면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뛰었다. 하루키가 묘비명에 적겠다는 말 한마디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말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겹게 마의 언덕을 지나갈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평탄했다. 별다른 오르막 코스 없이 내리막 길이 대부분이었다.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10km를 완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기록이 48분 14초였다.


겨우 10km 달린 것 가지고 호들갑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꽤 기뻤다. 5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와 싸우며 기록을 달성했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성취했다는 기쁜 마음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달리고도 에너지가 남았었나 보다. 아니면 해냈다는 기쁨이 피곤함을 눌렀을지도. 메달을 받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다가 자랑질을 했다. 아내에게도 기록을 보여주며 인증샷을 날렸다. 같이 달리기를 하는 카톡방에도 올리고, 페이스북 인스타 그램에도 올렸다. 자랑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지금도 자랑질을 이렇게 글로 정리할 수 있어 너무 좋다. 해냈다는 성취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그리고,


버킷리스트 하나를 달성했으니 또 다른 버킷리스트에 도전해보고 싶다. 더 큰 도전이다. 바로 하프에 도전하는 것이다. 한 번 달려보고 싶다고 계획했던 20여 km 달리기를, 차근차근 준비해보고 싶다. 내가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마음의 빗장을 하나 풀어보고 싶다. 달려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기도 하다.


왜 굳이 경주까지 갔을까?


서울에서 하는 마라톤도 많은데 굳이 나는 왜 경주까지 가서 달려야 했을까? 마라톤을 굳이 차비까지 들여가며 경주에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경주 마라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경주 벚꽃 길을 달리면 뭔가 색다를 것 같았다.


이런 환상은 3년 전쯤 회사 후배의 마라톤 후기 덕분에 생겼다. 후배가 주말에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에 다녀온 이야길 내게 해주었다. 사람이 꽤 많았다며 이런저런 이야길 해준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이야길 듣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보문호수에서 달리기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작년에 마라톤을 하면서 언젠가 경주에 가서 달려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올 초 버킷리스트를 만들면서 지인들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뛰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기왕 달릴 거면 경주에 가서 달려보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새로운 곳에서 뛰면서 우리만의 추억을 만드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혼자라면 할 수 없었겠지만 같이 간다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환상은 환상일 뿐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보문호 주변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달리는 동안엔 나는 벚꽃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뛰지도 못했다. 오로지 나는 아스팔트 위에서 뛰는 데에만 집중했다. 몸의 이상상태를 파악하며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을지만 고민하면서 갔다. 같이 간 사람들과도 달리기 추억을 만들기도 어려웠다. 나의 기록을 위해서 먼저 간 상태였기 때문에 레이스를 시작하자마자 헤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달리고 나서 내년에 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는 지인들이 아닌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경주가 달리기로 인해 내게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경주를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


경주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경주가 내게 특별해졌다. 이제까지 경주는 불국사, 석굴암 같은 신라의 수도로서의 역사적 유적지가 있는 곳, 아이들과 여름에 휴가 오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경주였다. 하지만 오늘, 달리기를 하면서 경주는 나에게 "벚꽃 마라톤의 장소"라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마라톤이라는 이름으로 경주와 나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년을 기약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하루키의 책을 읽고 새로운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2021년 뉴욕 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나가보고 싶어 졌다. 목표는 2021년 11월이다. 그리고 그날을 위해 이것저것을 상상하는 중이다. 경주 마라톤을 상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뉴욕에서 그렇게 달리고 나면 뉴욕도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


달리기를 하면서 알게 된 기쁨이다. 달리기를 하며 새로운 도시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달리기의 결과를 페이스북에다 자랑을 했더니 한 대학 선배가 "정말 알차게 보내는걸~"이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다. 선배 말마따나 나는 휴직기간 동안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하면서 보내고 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 것들이지만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전환기로서 "하프타임"을 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남은 후반기를 위해서 제대로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달리기가 있다. 아직 그게 내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겠지만 그냥 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렇게 나는 휴직하며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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