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낭자하다

호치민의 석양

석양을 볼 때면 가끔 걷잡을 수 없는 정체 불명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곤 한다. 정체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정체를 묘사하지 못하는 내 언어의 빈곤 탓일 수도 있다.


높은 빌딩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강변에서 살다 보니 탁 트인 하늘 위로 깔리는 아름다운 노을을 볼 기회가 많아져서 좋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는 아파트 높이 때문에 시야에 걸리는 스카이라인도 사뭇 달라져 다소 거슬리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어쩌다 불타는 노을을 목격하는 운 좋은 경우도 제법 있는데 그때는 '불타는'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의 형편없는 어휘 창고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다.


며칠 전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고가와 아파트 공사 현장 위로 참으로 곱고, 아름답고, 정열적으로 '불타는' 석양과 마주쳤다. 해는 곧 지평선(아니 건물들) 너머로 넘어갈 참이었다. '불타는’ 옷자락들을 사방에 휘감아 뻗치고서는 정작 자신의 얼굴은 숨기려는 형상이다. 아, 저걸 담아야 하는데 싶어 주섬 주섬 핸드폰을 꺼내드는 사이 얼굴은 사라지고 길게 여운을 남기는 옷자락들만이 서글서글하게 섞이고 있었다.


아이, 아쉽다.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아이가 묻는다.

뭐가요?

넘어가는 해를 찍으려고 했거든.

왜요?

왜냐고? 아름답잖아.


왜냐니. 그래, 왜 찍으려 했을까. 박완서 선생이 쓴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를 천천히 다시 읽어 본다. "그날의 노을이 좀 유별나게 낭자하긴 했어도"라는 표현이 나온다.


낭자하다!


노을이 낭자하다,라니. 나는 이 말을 찾고 있었다는 듯 무릎을 친다.

선생이 아가일 적 곧잘 숙모 등에 업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별안간 하늘을 가리키며 무섭다고 몹시 울었는데 그때 마침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날의 노을이 “유별나게 낭자했던” 것이다. 아이를 달래려고 숙모가 동네를 돌며 뛰고 흔드는 사이에 "노을은 사위고 아이는 잠든 것으로 그 이야기는 끝난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결론 없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아이에게 그렇게 크게 겁을 준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후 나이를 많이 먹은 오늘날에도 유난히 곱고 낭자한 저녁노을을 볼 때면 내 의식이 기억 이전의 슬픔이나 무섬증에 가 닿을 듯한 안타까움에 헛되이 긴긴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할 때가 있다.

- 박완서, <기나긴 하루>,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중


나는 이 부분이 좋아 두어 번 반복해서 읽는다. 낭자한 저녁노을과 기억 이전의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슬픔이나 안타까움. 내가 찍으려던 것도 이러한 무의식적 반사 작용에서였을까. 알 수 없다.


최근 낭자한 저녁 노을을 가장 잘 포착했던 때는 몇 년 전 아이 학교의 저녁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이다. 낮은 교정 담벼락 위로 펼쳐진 노을이 하도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넋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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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이렇듯 낭자한 노을을 자주 보게 된다면 그것도 다 내 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히 바라볼 텐데.


(2015)


*신대철이 연주하는 게리 무어의 Sunset.

https://youtu.be/cOyY5VPCx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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