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의 시학 - 표면으로의 탈출

이수명 <표면의 시학>을 다시 꺼내며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횡단>이라는 시론집을 통해 이수명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날, 시간이 꽤 남았고, 가까이 도서관이 있었기에. 문학 코너를 서성이다가 누군가 읽고 선반에 놔둔 책이 눈에 들어와 집어들었는데 그 자리에 서서 붙박인 듯 읽다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읽었다. 결국 약속 시간에 조금 늦었고, 가방엔 도서관에서 대출한 <횡단>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마침 출간된) 이수명의 두 번째 시론집 <표면의 시학>을 구입했고, 깊숙이 빠져들었다. 밑줄을 긋지 않은 페이지가 거의 없을 만큼. 그건 마치 일주일 만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느낄 법한 감동 같은 것이었다. 허겁지겁 삼키면서도 입 안 가득 퍼진 커피향을 온몸으로 만끽하기 위해 눈을 지긋이 감는 것과 같은. 읽다가 멈추고, 인용된 시와 시인을 찾아 읽고, 다시 돌아와 또 조금 읽고. 커다란 롤리팝을 야금야금 빨아먹는 것처럼. 좋아하거나 호감을 느끼는 시나 시인이 호출될 때마다(신해욱, 서효인, 강성은, 성동혁, 장승리, 이윤설, 이제니, 이선욱, 박준 등) 반가워하며. 내가 애정하는 김언의 <모두가 움직인다> 혹은 김준규의 <네모> 같은 시집이 길게 언급될 때는 들뜬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 내게 꼭 필요한, 필요한 줄 몰랐으나 읽다 보니 절실했던 것이 틀림없는, 그런 책을 손에 넣고 (밑줄이나 메모 따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신나게 탐닉할 수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그럴 만했다. 해외에 나가면서 쓰기 시작한 시들은 대부분 감정의 분출에 불과했고, 자폐에 가까웠으며, '시적인 것'이라는 강박에 매몰된, 그야말로 하치장에 쌓아놓은 쓰레기들이었다. 나는 내가 쓴 것들이 쓰레기인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혼자 시를 쓰는 것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혼자 좋자고(나를 덜어내자고) 쓰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게 없는' 혹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갈급증으로 초조해졌다. 쓰고 나면 어딘가 모르게 가벼워졌지만 늘 무언가가 미진했고 석연찮은 구석이 남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는가? 내가 알고 싶은 나의 마음을 글로 붙잡았는가? 답답증.


혼자 미련하게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데, 파도 파도 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어디서도 수맥은 찾을 수 없고, 수맥을 알려주는 도구나 조언조차 구할 수 없을 때. 파다가 덮고, 덮은 곳을 다시 파고. 자가당착.


그러던 차에 한국에 돌아왔고 어쩌다 보니 소위 제도권 문학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모르던 것을 더 모르게 되었다는 것.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것은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는 상태를 알게끔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아무리 나무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애써도 결국 나무 바깥의 나로 돌아와 나무의 표면만을 바라볼 뿐인 나를 발견하는 것. 내게 시쓰기의 곤란함은 그런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수명이 <표면의 시학>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론집에서 시쓰기의 곤란 중 하나로 '표면'을 지목한 순간, 나는 거의 눈물이 나올 뻔했다(거짓말 약간 보태서).


시쓰기가 곤란한 것은 아마 시쓰기가 기어이 표면에 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표면이기 때문이다. (...) 표면은 내면이 아니고 이면도 아니다. 보이는 부분이다. 따라서 시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에는 들어 있다. 시는 보이는 것을 잘 보게 하는 것이다. '표면의 시학'은 이러한 생각에 부합한다.


- 이수명, <표면의 시학>, 난다(2018), '책머리에' 중에서


3년 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든다. 오늘 아침 우연히 블로그에서 읽은 이수명의 글로 촉발된 다시 읽기인 셈이다. 시 쓰는 이수명보다 시론을 쓰는 이수명에게 더 끌린다. 다시 읽어도 새롭게 와닿는 글들. 무수한 밑줄과 휘갈겨쓴 나의 메모들. 낯익으면서도 낯설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얼마큼 다를까.


이수명은 블랑쇼의 '바깥'의 사유를 문학적으로 이동시켜 '표면'으로 표현한다. 블랑쇼가 '바깥'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추방, 무의미, 불확실, 혼돈과 같은 것들을 그대로 보유하면서도 바깥보다 '추방'의 의미가 약해진 '표면'에 주목하고 있다. 일차적인, 우선적인 거류지로서. 나를 감탄시켰던 (그래서 dog's ear로 접어놓았던) 페이지의 일부를 들여다본다. 내 머리를 내려쳐 번쩍 일깨웠던 순간을 상기한다. 정신 차려!


표면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세계의 전모이다. 이것이 세계이다. 감추어진 것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감추어진 어떤 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관념이다. 물론 찾는 것은 감추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우리는 사실상 찾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면은 하나의 덧붙여진 체계이다. 인간에게 지속되어온 이 질서는 우리를 강박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면이야말로 진리가 깃드는 곳이 아닌가. 진리는 아마도 이면을 담보로 한 인간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면의 자리, 인식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상상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 있는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 같은 책, '시는 어디에 있는가 - 표면의 시학' 41쪽


머리를 얻어맞았다고 하루 아침에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곳이 아닌 저곳, 여기가 아닌 너머,의 관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온 나 같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생각을 거듭해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수명의 지적은 뼈아프다. "표면을 보지 않으려 하면서 이면을 제조하고, 상징으로 무거워지는 것을 문학의 독창성으로 여겼"던 오랜 통념과, "사실상 우리가 만들어낸 것에 스스로 묶이면서 자유를 반납하는 것"에 대한 비판. "이와 정반대로 눈앞에 있는 것, 드러난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 강력한 직접성이 바로 시이고 예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42쪽)


여전히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어떤 시도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도. 변화란 마음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며칠간 어떤 문장들이 내게 와주기도 했다. 사물에서 촉발된 표면적인 문장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적어놓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후이다.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보이지 않는 이면과 너머의 세계를 지시하려는 장치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무기력.


이런 무력함에 빠질 때마다 이 책을 자주 뒤적여야 할 것 같다. 표면도 못 보면서 나는 왜 자꾸 이면을 들여다보려 하는가.


나는 무거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꾸 이면으로 정향되어 추방과 추방의 깊이를, 관념과 인생의 심연을 가리키는 시에 끌리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한순간 시적인 것으로 통용될 수는 있지만, 시는 시적인 것에 갇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는 표면을 찾아 움직인다. 지속적으로 시적인 것으로부터 도피하면서 표면으로 올라가 그 무심한 격랑과 무차별 속에 떠다닌다. 그물이 잔뜩 드리워져 있는 이면에서 벗어나 일시적이고 번뜩이는 표면을 탈환하는 것, 표면으로의 탈출, 이것이 시의 생명이다. 표면은 눈이 없다. 아무것도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광대한 표면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표면은 알 수 없는 영원한 사물의 세계이며, 여기서는 인간도 사물인 것이다. 사물은 진리를 모른다. 사물은 원래 의미가 없다. (42쪽)


표면으로의 탈출. 내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어쩌면 이것을 매번 망각하는 탓에 나는 시를 못 쓰는지도.


(2021-5-13)


ps. 현대시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