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혹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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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영자신문을 훑다가 뒤늦게 크리스티안 짐머만 공연 소식을 보았고. 프로그램을 보고 약간 의아해하다가. 바흐-시마노프스키-쇼팽. 짐머만과 바흐의 매치는 다소 생소하고. 시마노프스키는 낯선 작곡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니잖아. 짐머만이니까. 한때 귀에 달고 살았던.
짐머만이 온대. 빈에게 말했고. 그는 행동주의자답게 바로 티켓을 알아보았고. 서울 공연 좌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보자. 봐야지. 봐야하지 않겠어.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추가 오픈 티켓으로. 2층 구석자리에서. 그의 한국 투어 마지막 공연을 보았고. 공연 전 안내방송이 독특해서 주의를 끌었는데. 휴대폰 전원을 꺼달라는 흔한 메시지가 아닌. 그 이상의 디테일한 신신당부(박수 타이밍에 대한 주의까지). 짐머만의 완벽주의와 까다로움이야 익히 알려져 있으니. 연주자를 배려하려는(그리하여 만에 하나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기획사 측의 고심이 반영된, 맞춤형 메시지일 것이라고 짐작.
프로그램 북을 보고서야 대구/부산/대전/서울의 날짜별 프로그램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서울 마지막 공연에선 브람스의 간주곡 Op.117이 (아쉽게) 빠졌지만. 대신 '시마노프스키'를 만날 수 있었던 공연.
1. 바흐의 파르티타 1-2번
글렌 굴드의 연주에 익숙해져서인지. 짐머만이 연주하는 바흐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 정연함 대신 짐머만 특유의 루바토가 느껴지는 서정적인 바흐. 나는 짐머만의 루바토를 사랑하지만. 공연 이후 굴드의 바흐로 되돌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 미셸 슈나이더가 말한 굴드의 "헐벗은 연주"가 바흐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인가. "가장 간결한 것에 대한 추구와 최소한의 것에 대한 욕구" 때문에 굴드는 "장식적인 기능을 삭제"한다. 페달은 "사용되지 않는다."
"굴드의 미학은 발견을 돕는 미학이다. 본능적으로 연주가들은 제거하기보다는 첨가하는데, 그의 미학은 제거하는 편을 택한다."
-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이창실 옮김, 동문선, 2007, 101-102쪽
'제거의 미학'을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짐머만의 파르티타 2번은 빠져들듯 감상했고. 페달링 때문인지 공연장 구조 때문인지. 울림은 계속 신경이 쓰였고.
2. 시마노프스키의 프렐류드와 마주르카
이번 공연으로 '마주친' 혹은 '발견한'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Karol Szymanowski). 짐머만은 9개의 프렐류드 중 1, 2, 7, 8번을, 20개의 마주르카 중 13-16번을 연주했는데. 시마노프스키의 마주르카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프렐류드엔 매료되었고. 덕분에. 공연 후 이틀 내내 시마노프스키의 전주곡과 변주곡, 연습곡들을(그리고 피아노 소나타까지) 반복 청취하는 중. 짐머만 연주를 계기로 만난 시마노프스키라니. '계기'와 '만남'에 대해 생각하며.
3. 쇼팽의 소나타 3번
쇼팽 스페셜리스트답게. 명불허전. 낯선 공간을 걷다가 익숙한 장소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4. 앙코르 곡
엄청난 갈채가 거듭 쏟아진 후. (앙코르 곡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가 피아노 의자에 다시 앉아 영어로 짤막하게 멘트를 잇는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를 언급하며 슬픔을 표시했고.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 출생인) 시마노프스키를 언급. 곧바로 연주가 이어졌고. 아마도 시마노프스키의 곡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상당한 집중력과 밀도 높은 감정의 연주. 탁월했다. 뜻밖의 훌륭한 선물. 곡 제목을 알고 싶은데.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폴란드 작곡가 그라지나 바체비츠의 피아노 소나타 2번 2악장이었다.)
5. 관크
관크. 새롭게 알게 된 단어이다. 네이버 시사 사전에 따르면. "한자 ‘觀’과 ‘비판적인, 비난하는’ 등의 뜻을 가진 영단어 ‘critical’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 공공장소에서 다른 관객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날의 하이라이트 '관크'는 바로 저 밀도 높은 앙코르 곡 연주에 한창 빠져 있을 때 발생. 고요한 타건, 음 하나 하나에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마지막 부분. 2천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집중해서 듣는 몰입의 순간에. 콘서트홀 전체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AI 기계 목소리. "음악을 찾지 못했어요.” 너무 놀라 숨을 헉 들이킬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 곡 제목을 알고 싶어 검색을 한 모양. 잘못된 판단과 매너는 참사로 이어지고...... (곡이 끝나고 짐머만은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사실 이날 관객의 관람 수준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는 일도 없었고. 기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연주자가 나타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를. 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단번에 박수를 멈추는 신공. 마치 관객들끼리 미리 리허설이라도 한 듯. 그 많은 사람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숨도 크게 쉬지 않은 채 음악에만 집중하는 느낌이랄까. 중간에 몇 번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내 자리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무엇(매우 큰 소리여서 핸드폰이었을 듯)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소리. 조마조마. 얼마 뒤 누군가 바깥으로 나가려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 조마조마 x 2. 그래도 큰 무리 없이 연주는 진행되었고. 짐머만 또한 만족해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앙코르 곡에서 그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이 일이 아니었다면 두 번째 앙코르 곡도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6. 피아노 솔로
예민함, 까다로움, 완벽주의, 편집증적 성향 등은 예술가들의 공통분모. 완벽한 사운드를 위해 자신만의 피아노를 고집하는 짐머만을 보면 굴드가 겹쳐 떠오르고. (물론 둘의 스타일과 영역은 완전히 다르지만.) 다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면.
지나치게 까다롭게 소리의 균질성과 완벽성을 요구하여 기술자들을 경악케 한 피아니스트가 굴드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 사람들은 피아니스트를 자신의 피아노와 하나 되게 만드는 사랑 - 뒤섞인 감정 - 을 이해하기 어렵다. 피아노가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문다는 사실, 제 구실을 못하고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 피아니스트들에게 피아노는 그들의 몸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피아노는 그들의 몸 자체이며, 몸을 갖기 위해 피아노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 피아노가 되는 것.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70-76쪽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인터뷰를 보았다. 뜻밖의 프로그램, 뜻밖의 알찬 내용이었는데. 임동혁 역시 연주할 때 자신을 지우고 음악 속으로 자신을 용해시키려는 듯 몰입하는 피아니스트들 중 하나이다. (나는 그의 고유한 표정 때문에 오히려 그가 연주하는 동영상은 보지 않는 편이지만).
준비와 노력에 관한 그의 인상적인 멘트 하나.
"300퍼센트를 준비해야 90퍼센트 발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300%를 준비해도 100%를 채우지 못한다. 300%를 준비해야 그나마 90% 발휘될 '가능성'이 있는 것. 심지어 '가능성'이지 '보장'이 아니다. 그 90% 가능성을 위해 300%를 준비하는 자가 아티스트 아닐까. 재능은 기본. 천재성보다는 노력. 영감보다는 루틴. 새삼 확인하며. 얼마 안 되는 양의 글쓰기(그리기/작곡하기/노래하기 등)에도 이러한 마인드를 품고 있다면. 그는 이미 예술가일까.
글쓰기에만 국한해서 앞의 글렌 굴드 관련 인용구를 적용해본다면. '백지 앞에 앉은 나'가 아니고 '나, 글쓰기 솔로'가 되는 것.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는, '글쓰기 솔로들' 혹은 '( ) 솔로들'에게도 축복을.
(202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