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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25. 2023

쓰기를 그만두기 위해 쓰기

양선형의 <감상 소설>에 부쳐

쓰기를 그만두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 양선형, '감상 소설', <감상 소설>, 문학과지성사, 2018





# 양선형의 첫 번째 소설집을 우연히 만났다. 우연이란 건 없나. 우연의 순간(이를 우연-1이라 부르자)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수많은 (또 다른) 우연들(이를 무한히 뒤로 뻗어가는 우연-2, 우연-3, 우연-4…로 부르자)을 전제한다면. 우연-1이 발생하는 순간 우연-2, 우연-3, 우연-4...들은 우연-1을 위한 필연적 조건처럼 재구성되는 건 아닐까. 이런 식이라면 ‘우연의 필연’이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표현은 아니다.


# 2018년. 박상영의 첫 소설집이 내게 무용한 피로감만 안겼다면. 같은 해 출간된 양선형의 첫 소설집은 내게 유용한 피로감을 안긴다. 여기서 ‘피로감’의 유용함과 무용함을 가르는 기준은 ‘미학적 문장’이다.


# 문학(비평)장(이런 말을 쓰는 내가 낯설다)의 최근 흐름에서 ‘미학주의’(이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라는 것을 인지하더라도)라는 말은 발을 디딜 곳이 별로 없어 보인다. 오래된 '미학'과 '정치'의 이항대립적(이것이 단지 소모적인 것인지 나름의 생산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논의들 혹은 (2000년대에 진은영이 불러온) 랑시에르를 경유한 사유를 통해 일견 이 둘의 화해 가능성을 보았다고 느끼는 평자들의 의견을 읽다 보면. 그 수다한 의견 각각의 타당성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미학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이제는 한물간 무엇처럼 취급받고 있는 듯한 느낌. 다소 유감이다. 인간의 '내면성(혹은 심연, 정신, 정동, 실재 등 뭐라 부르든)'에 관한 영역 또한 '90년대 문학동네'의 탄생/발전에 대한 최근의 비판적 시각과 더불어 심문에 부쳐지는 듯하다.


# ‘미학적 문장’이 대체 무엇인데? 그것이 미학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데? 라는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나 또한 궁색한 답변밖에 내놓지 못할 테지만. 미에 대한 기준이라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 혹은 주관적 취향에 가까운 개인의 판단 기준 어느 쪽으로도 쉽게 환원되지 않는 어떤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영역을 나는 상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런 건 없는 건지도. 만약,이라는 가정 혹은 상상이 실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 첫 단편 '해변생활자'를 읽으며 나는 매혹당한다. 거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해변’과 ‘모래’ 그리고 ‘바다’라는 단어가 주는 익숙한 관념들(세계, 시간, 죽음 등)에도 불구하고, 신선하게 읽히는 것은 ‘그것’으로 표상되는 ‘유실된 무엇' 때문일 것이다. 모호한 지시어로 반복되는 '그것'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어떤 주체가 찾아 헤매는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렇게까지 낯설고 새로울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새로울 것 없는 무엇을 새롭게 일깨우는 '어떤 힘'(말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을 되찾고 나면 제가 지금까지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말이에요. 만약 요행으로 그것을 발견한다고 해도 고개를 좌우로 휘저으며 지나치고 말겠지요. 무언가 익숙한 느낌으로 그것을 매만지다 어느 순간 그대로 내팽개치고 말겠지요." ('해변생활자' 중)


# 해설을 쓴 강동호 평론가는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개념으로 ‘불능’에 방점을 찍는다. (사실 강동호의 글은 해설이라기보다 양선형의 작품을 경유해 자신의 이론 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무능(impotence)과 구별되는 불능(impossible). 동시에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그’라는 지시 대명사를 ‘폐기된 고유명’으로 간주하고, 이름 없는 ‘그’ 즉 ‘자기 자신의 기원을 잃은 자, 반복되는 무능 속에서 깨어나는 자'를 위해 '불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나 평론가의 이 새로운 명명이 '그'의 과잉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 강동호가 천착하는 또 다른 개념은 ‘잠재성’이다. 잠재적(이는 정치성을 내재한다) 광장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가상성의 세계(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하는 광장이라는 공간적 형식)에 주목한다. 이는 들뢰즈가 '가능성'과 구분해서 사용하는 '잠재성'의 개념에 가까워 보인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주의>(김재인 역, 그린비, 2021)에서 베르그손의 ‘잠재성’ 개념을 밝히면서 ‘가능-현실’이 아닌 ‘잠재-현행’에 주목한다. ‘가능’은 유사성과 제한이라는 규칙에 순종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지만, ‘잠재’는 차이와 발산 그리고 창조라는 규칙에 따라 자신을 현행화(現行化)하는 것이다. 어쩌면 강동호가 말하는 '무능'은 '가능성'에, '불능'은 '잠재성'에 각각 매치되는 개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나의 오독일 수도 있다.)


# '불능'으로서의 잠재성이 현행화되는 양태는 어떤 것인가? 강동호는 이를 '소진/소모'의 개념으로 연결시킨다. (일견 바타유적인 사유가 드러난다.)


"자신의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행위를 반복한다는 역설. 불능의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다 사용해버림으로써, 모든 역량을 소진시키는 행위의 되풀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 실패를 매개로 자기 자신의 탈진을 도모하는 일이다. (...) 따라서 불능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일은 회복을 지연시키는 일, 무언가를 소모하는 작업의 지속적 반복이다." (강동호, '해설: 불능의 시뮬라크르' 중)


# 말하기(글쓰기)의 잠재성이 말하기(글쓰기)의 (미학적/정치적) 현행(現行)들로 일어나는 사태. 그러한 사태 자체, 혹은 과정을 목도하는 경험으로서의 '읽기'를 나는 선호하는 것 같고. 그럴 때 자연스럽게 불려 나오는 텍스트들은 온통 '말'에 대한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들이 그러했고, 베르나르-마리 콜테스가 그러했고. 로베르트 발저, 정영문이나 한유주도 그러할 것이고. 루이-르네 데 포레의 <말꾼>도.


#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것,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위해 말하는 것,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말하는 것, 말이 어떻게 말을 낳는지 따라가 보기 위해 말하는 것, 말하는 '나'는 누구인지를 해명하기 위해 말하는 것, 등등에 대해 골몰한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러고 있는지도...)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기'는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 이라고나 할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쓰자,라는 결심은 무용한 걸까 유용한 걸까.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을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유용할 수도. 아는 것에 대해서만 쓰자,는 마음이 (아는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결론으로 흐른다는 점에서는 무용할 수도. 아니지. 또 다른 목소리가 반박한다. 아는 것이 없으니 ‘아는(혹은 모르는) 것에 대해 쓸 수 없음’에 대해 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쓰면서, 아는 것도 모르는 것이 되고, 쓰면서, 모르는 것을 더 확실히 모르는 것으로 수용하는 ‘나’에 대해서 (다시) 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그래서. 결국 어쩌자는 것이냐. 아는 것도 모르고, 알지 못하는 것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느낌(혹은 새삼스런 각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이렇게 뭉뚱그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대체 ‘우리’가 누군데?)는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를 연 저 문장은 참으로 적절하지 않은가. “쓰기를 그만두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 나는 ‘쓰지 못하는 마음’을 ‘쓰고 있는’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저 문장 속 ‘사람들’에 ‘나’를 편입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결국엔 쓰기를 그만두기 위해, 기어코 그만둘 수밖에 없는 지점까지 ‘나’를 몰고 가기 위해 쓴다는 말. 이건 참 어쩔 도리가 없다. 오래도록 쓰지 않다가, 어쩌다 쓴다는 말이, 쓰지 않기 위해 쓴다,라는 말이라니. 이런 모순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쓰는 건지도.


"그것에 관한 이야기 말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오히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잃어버릴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사실 저는 그것을 소유했던 적이 없어요." ('해변생활자' 중)


나는 무능의 인간인가, 불능의 인간인가.


(202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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