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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13. 2022

형편없다

폴린느 사실 나는 형편이 없어요 걸핏 하면 취하기를 좋아하고 쓸데없이 침울해지고 전기세도 밀린데다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순전히 L 그리웠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어디에다 토로해야 좋을까요 미안해요 오늘은 취했고 오늘은 이런 글을 쓰고 싶을 뿐이에요 


- 김이강, ‘폴린느부분, <당신 집에서   있나요?>, 문학동네, 2012




폴린느 사실 나는 형편이 없어요,로 시작하는 시. 첫 문장에서 나는 H를 떠올렸다. 어느 날 H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형편없어.”


우리는 H가 좋아하던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감지되자 H는 바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형편없다니. 형편없다. 형편없다…….


형편없다,의 사전적 정의:

1. 결과나 상태, 내용이나 질 따위가 매우 좋지 못하다.

2. 실망스러우리만큼 정도가 심하다.


자신을 ‘형편없다’고 말하는 자의식이란 어떤 것일까. ‘자기애’와 ‘자기 경멸’(혹은 ‘자기 조소’)의 병존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할 말이 많은 사람이지만, 자신을 ‘형편없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한 H 역시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던 적은 있어도 그 ‘자기기만’을 떠받치고 있는 ‘자기애’의 자리를 ‘자기혐오’에 내준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러저러하게 표현할 수는 있지만 ‘형편없다’는 단어를 직접 내뱉은 사람이 내 주위에 있었던가? H의 이 기습적인 말에 순간 조금은 당황하고 조금은 우울해졌던 기억. 이런 종류의 고백은 반발심인가, 체념인가, 자학인가, 허세인가, 용기인가? 위선과 위악은 어쨌든 ‘가면’이라는 껍질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한 끗 차이다.


나는 나 자신을 ‘형편없다’고 간주한 적은 없어도 내가 쓴 글(특히 시)을 ‘형편없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시인 R이 그간 혼자 몇 편의 시를 써봤는지 물었을 때, 나는 어림잡아 대충의 숫자를 이야기했고 R은 생각보다 많다고 느낀 듯했다. 의아해하는 그의 반응에 이렇게 덧붙였던 기억.


“다 쓰레기죠.”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진심이 아니었다. 쓸 때는 꽤 괜찮은 감각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 들여다보면 ‘형편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므로. 조그맣게 중얼거린 적도 있다. “형편없네.” 참담한 실패의 자국들. 흰 바탕에 어수선하게 찍혀 있는 잉크의 흔적 같은 것.


내가 만든 것들에 ‘쓰레기’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신을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형편없다,는 말속엔 그렇게 형편없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일말의 기대가 숨어 있다. 자기 자신을 혹은 자신이 만든 어떤 것을 100% 형편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살을 하거나 자신이 만든 것을 모조리 불태울지도 모른다.


나중에 R은 내게 ‘시를 썼다’기보다는 ‘혼자 시와 놀았다’는 표현을 해주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쓰는(평가하는)’ 시간보다는 ‘자기 자신과 노는’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형편없이 쓰기,는 있을 수 있지만, 형편없이 놀기,는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싶다). 놀기,는 수식어 없이 그 자체로 충만한 단어라는, 뭐 그런 생각.


놀기,라는 말이 나온 김에. 잠시 샛길. 빈은 자신이 늘 ‘놀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빈은 늘 놀 궁리를 한다”라는 문장이 아니라, ‘빈은 늘 놀 궁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빈’이 중요하다. 놀 궁리를 하는 빈과, 놀 궁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빈,은 다르다. 놀 궁리를 하는 빈,은 다소 수동적이지만, 놀 궁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빈,은 놀 궁리를 하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확보한다.


그렇다면. “나는 형편없다”라는 문장이 아니라. ‘나는 형편없다,는 것을 아는 나’가 더 중요한 것인지도. H의, 그리고 시인의, “나는 형편없다”라는 고백은 “나는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나를 알고 있다”는 고백으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렇게까지 형편없지는 않다”는 모종의 메타적 시선.


어느 겨울, 어느 술집 간판에 이렇게 적힌 문구를 본 적 있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알고 보니 동화작가이자 시인인 소야 신천희 스님의 ‘술타령’이라고.) 술 먹을 궁리만 하는 나,가 아니라 술 먹을 궁리를 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식이 더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다.


오늘의 글도 형편없네. 뜬금없고, 두서없고, 어수선하고.

하지만 이런 문장으로 간신히 마무리할 수는 있다.


“오늘의 글도 형편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혹은 이런 식으로.


“아무리 형편없어봐라 내가 놀 궁리를 멈추나 계속 놀지.”


(202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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