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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08. 2022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의 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에 부쳐

1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중략) 


7

이제 밤이 다 가고 늙어버린 

아침이 백색의 천을 이끌고 오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뒤지고도 끝내 찾지 못한

인간이 걸어오고 있다 패배했지만

패배하지 않았다 푸른 종이에 쓰일

난독의 감정이 지구를 조금 끌어올린다

이곳은 생활이 생활로 이어지는 소리

생계가 생계를 당기는 냄새로 가득하다

백색의 천이 조금씩 검붉어질 때,

인간은 서 있다 인간은 날아가지 않는다

벗어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살아간다

 

8

노파는 느린 손가락으로 빈 새장을 흔든다


-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 부분,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사, 2018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뒤지고도 끝내 찾지 못한 인간이 걸어온다. 실패한 인간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 패배했지만 패배라는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궤적과 흔적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자취를 응축할 수 있는 감정은 어떻게 언어화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난독의 감정들이 지구를 끌어올린다. 와중에도 생활의 소리와 생계의 냄새는 지속된다. 감각 너머의 세계와 감각 세계 사이에서 헤매다 늙어버린 자. 백색의 천은 차츰 검붉어지고. 인간은 여전히 푸른색을 찾고 있다. 끝내 찾지 못한 정신이 중력을 벗어나 날아가고자 할 때조차 인간은 서 있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인간은 날아가지 않는다. 벗어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간다. 되돌아온 여기, 빈 새장 앞에서.


8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은 짧은 한 줄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연은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이고, 마지막 연은 "노파는 낡은 손가락으로 빈 새장을 흔든다"이다. 


모든 것을 뒤져 찾으려 했던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파랑새’의 신화는 당신이 찾아 헤맨 대상이 바로 곁에 있는 새장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주체는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을까. 파랑새는 없다는 것. 새장은 늘 비어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감각만큼은 혹은 믿음만큼은 또렷한 것이어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뒤지고도 끝내 찾지 못할 ‘그것’을 향해, 예정된 실패의 노정을 감수하기로 결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심은 선택이기도 할 텐데. 선택하는 한 실존하는 삶이라고 우리는 믿고 싶어한다. 선택의 의미를 알고도 혹은 모른다는 것을 알고도 선택하는 것.


살아간다. 또 다른 빈 새장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것들이 남긴 실재의 흔적을 찾아서.


(20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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