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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07. 2022

격발되거나 되지 않거나

신용목의 시 ‘격발된 봄’에 부쳐


나는 격발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폭발하지 않았다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

달아나는 풍선


나의 방향엔 전방이 없다 멀어지는 후방이 있을 뿐


아무 구석에 쓰러져 한때 몸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다 다가오는 허방이 있을 뿐


어느 것도 봄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봄이 볕의 풍선을 뒤집어쓰고 달려가고 있다


살찐 표적들이 웃고 있다


- 신용목, ‘격발된 봄’ 전문, <아무날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12




관자놀이를 정밀 타격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격발되기 위하여. 폭발하지 않는 것들은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 달아나는 풍선과 같다.


전방이 없는 방향에 대한 것. 멀어지는 후방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다 오래된 것들이다.


한때 몸이었던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 아니다. 이건 거짓말. 한때 몸이었던 것들은 없다. 몸이 없는 것들의 육화(肉化)를 상상하는 것. 이것만이 여태 해온 일. 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이라고 진술할 수 있는 증거가 내겐 없다. 이제 와서 ‘화약이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라는 말을 붙여본들. 희망과 체념을 뒤섞어 ‘발현되지 않은(혹은 못한) 잠재성’ 따위의 이름을 지어붙이는 것밖엔 되지 못한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한겨울의 날씨. 입춘이라는 표지는 한겨울이라는 사태 속에서 봄이 올 것이라는 (경험과 이성에 근거한) 예측 가능한 고지를 전한다. 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나? 방향이 없다고 믿고 싶은 것도 방향일 텐데. 다가오는 허방. 이런 말은 이제 진부하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기에 반박할 수도 없다. 아니, 반박할 수 없기에 부인할 수 없는 것인가.


어느 것도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봄의 관자놀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시인이 말하는 봄이 ‘시대의 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한다.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달아나는 모습. 그러나 격발되지 않는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동참하고 싶기에. 그것이 정치적인 맥락이든, 사회적인 맥락이든, 개인적인 맥락이든, 존재론적인 맥락이든. 참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이런 것이지 않을까. 어둠을 말하면서 어둠을 믿지 않는 것. 볕의 풍선을 뒤집어쓴 가짜 봄 같은 것.


신뢰할 수 있는 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을 빌면.


“비관주의에 침윤되는 것과 비관을 조직하는 것은 좀 다른 일”이라는 것. “비관주의자는 비관주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낙관주의가 가져올지도 모를 상처를 두려워하는 자”라는 것. “사상 최고의 비관주의자도 자신의 비관주의가 적어도 자신만은 구원할 거라 은밀히 믿기 때문에 비관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비관적이되 비관주의자는 아닌” 이들의 글을 나는 좋아했(해왔)던 것 같고.


살찐 표적들은 무엇인가. 복수성으로 드러난 표적들. 표적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그 중 하나가 나인지도. 어차피 나는 나'들'일 것이므로. 하나이며 여럿인. 격발되지 않은 채 달아나는 풍선(들)처럼. 나는 웃고 있다. 어쩌면 울고 있나?


웃고 우는 것에 관해서라면. 시인의 다른 시를 보아도 좋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지만

하루의 정수리를 따 둥글게 깎아내는 칼끝을 한입 가득 베어 무는 얼굴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있지만


-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지만’ 부분 (같은 시집)


“하루의 정수리를 따 둥글게 깎아내는” 작업. 그 작업을 가능케 하는 ‘칼’의 존재. 그 “칼끝을 한입 가득 베어무는” 일. 그리고 그 베어무는 일을 통해 드러나는 얼굴의 표정 같은 것. 나는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만약의 생’ 같은 걸 상상할 수도 있고. 사실 나를 촉발한 시는 ‘만약의 생’이었으므로.


창밖으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달에 대하여


경적 소리가 달을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대하여


어느 정오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냐고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어김없는 자정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불을 끄고 누웠다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 같은 시집, ‘만약의 생’ 전문


그러니까.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 이는 어설픈 희망과 구원을 품은 문장이 아니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지옥은 무엇인가.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태? 그림자를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는 사태? 다음 생에 입을 바지를 끌고 다니는 것은 지금 생에 입지 못할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림자를 개켜 넣을 수납장이 없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할지도. 만약의 생을 위해 지금의 생에 드리워진 바지의 그림자를 굳이 내던지고 싶지 않다는 사람의 심정이랄까. 자정에 발가벗고 뛰어다닐지언정 애써 수납장을 마련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지옥은 무엇인가. 내가 지옥에 있(을 수도 있)다는 혹은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사태일 수도 있다. 그 무지의 사태를 자각하는 장소가 거울일 것이고. 지옥에 있든 있지 않든 지옥이라는 가능성에 인접해 있는 나의 위치를 새삼 혹은 불현듯 깨달을 때 거울은 맑아진다. 신은 거기서 가장 잘 보일 것이다. 아니 그럴 것이라는 믿음.


격발의 문제로 돌아가서. 만약 격발되지 않는 생이 지옥이라면. 거기에도 신은 보여야 하고. 그러니. 불을 끄고 누워 그리움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스위치를 눌러 그리움을 차단하는 순간 (그나마 남아 있을지 모를) 격발의 가능성도, 신을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차단될 테니까. 어차피 신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의 무엇,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를 감지하는 (혹은 감지했다고 믿는) 내적 체험일 테니까. 


(20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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