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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8. 2020

견디는 것에 관하여

고통총량불변의 법칙을 믿고 싶은 이에게


요즘 중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중국어를 빙자한 한자 공부에 더 가깝지요. 오늘 적어놓은 단어는 受到입니다. 중국어로 '셔우따오', '견디다'라는 뜻이더라구요. '수도'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는 없는 표현이라 그 한자의 조합이 흥미로워 어딘가 적어두었습니다. 받을 수受, 이를 도到. 고통을 받아가며 이르는 길, 정도의 자의적 해석으로 마무리하면서요. 견디고 살아내는 것이 곧 수도(修道)이기도 하겠거니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말이지요.


얼마 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불현듯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고통총량불변의 법칙, 어쩌구 운운했더랬죠. 이러저러한 맥락 속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말인데, 상대방이 저를 빤히 쳐다보더라구요. 마구 공감(하고 싶어)하는 눈빛으로요. 그게 무슨 말인지 좀더 자세히 얘기해달라고 하대요. 


저는 좀 멋쩍기도 해서 그냥 여기저기 주워들은 단어들을 조합해서 내 맘대로 지어낸 말이라고 둘러댔죠. 인간이 평생 받을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서,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면, 언젠가 받을 고통을 미리 당겨 가불해서 받는 것이요, 지금 평온하다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고통과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사는 것이라구요.  


그러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식의 말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의 표현이기도 하네요. 제가 이 말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는, '지나가리라'는 말은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지금의 고통을 어떻게든 회피하여 흘려 보내자,라는 말처럼 들려서였거든요. 차라리, 현재의 고통은 불가피한 것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되 현명하게 잘 견뎌내자,라는 말이 더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고통총량불변의 법칙'에 의하면, 이 역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지금의 괴로움이 미래의 평온을 담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지금의 괴로움은 지금의 괴로움일 뿐인데 말이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도 현재의 고통을 달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아파 죽겠는데, 좀 있으면 나아질 거야, 라는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거든요. 이 말에 이토록 어깃장을 놓고 싶어했으면서 그날은 또 무슨 생각으로 고통총량불변의 법칙 운운하면서 가소로운 말들을 주워섬겼을까요. 상대방의 가시적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박애 정신의 발로였을까요? 그래도 몇 년 더 살았다고 나잇값 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인 걸까요?   


이 정도의 자가당착은 애교로 봐주어야 하는 걸까요? 나이 들면서 생각들이 정리되기는커녕 자기 모순에 부딪쳐 더 복잡한 꼬리를 물게 되기도 하니, 아, 사람은 언제쯤 단순해질까요. 더 단순해지고 더 입을 다물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2016-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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