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줄 쓰려고: 시와 생활

문성해 -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 문성해, <입술을 건너간 이름>, 창비 2012,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전문




그렇지, 그런 마음이지.

아침에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 때문에 종일 시 한 줄 쓰려고 종종거리는 시적 화자의 마음.

알 것도 같지.

시인의 애틋한 집요함이 번번이 생활의 발목에 걸려 그 리듬을 잃어버리는 것.


얼마 전 소설가 P가 말했지.

우리는 일상을 위해 살고, 일상이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지만, 일상 안에만 있으면 문학의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은 슬프고도 지난한 일이라고도 덧붙였어. 일상에 잠식되는 것이 괴롭더라는 것, 그래서 어렵게 얻은 교수직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했다는 것.


나는 질문했지.

당신이 말하는 ‘일상’의 기준은 무엇이냐고. 생계를 위한 밥벌이 활동에 일상의 범위를 한정하는 건 아닌가 궁금했거든. 그러자 그가 그 유구한 질문을 내밀더군.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 질문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모든 것(시스템)이 자신에겐 ‘일상’이라는 거지. 일상을 벗어나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을 때 문학,이라는 과정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일상과 분리된 시간과 공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요점이었던 것 같아.


내가 문성해의 시에 끌렸던 것은 바로 이 점일 거야. 시와 생활 사이에서 분투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예술과 생활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엿보는 것은 늘 매력적인 일이지. 그 흔들리는 과정 자체가 예술가의 삶의 방식일지도 몰라.

열렬한 흔들림의 결과물을 우리는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것일 테고.


뒤샹은 “삶을 예술과 바꾸지 않기”라는 말을 했다지. 맞는 말이야.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라는 전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엿 바꿔 먹듯 삶을 통째로 바쳐 예술을 획득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인지도 몰라. 극단적 예술 지상주의자가 아니라면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하지.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그 무엇을 꿈꾸는지도 몰라. 누군가에겐 시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그림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음악이겠지.


사실 난 내 입술 간신히 축일 이슬 한 방울이어도 족하겠는데. 맹독까지 갈 것도 없이.


최근 읽은 이재무 시인 인터뷰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인상적이었지.


그는 “영혼을 잠식하더라도 불안은 시인에게 필요한 법인데 지금은 내 생에서 최고로 안락한 시기여서 두려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 말끝에 시와 안락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쪽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단호하게, 생활이라고 답했다.

- 조용호, <여기가 끝이라면>, ‘시와 생활이 따로 놀면 안 됩니다’, 319쪽


지금 보니 ‘생활’이라는 단어에 내가 힘차게 동그라미를 쳐놨군 그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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