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파트 근처에 전통시장이 서는 날이다. 전통시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활에 필요한 많은 물품들이 교환되던 공간이었다. 어릴 때, 장날이 되면 괜히 들떠서 엄마를 따라가고는 하였다. 엄마를 따라 장에 가면 엄마는 난전에 파는 떡이나 또 다른 맛있는 것들을 사 주시곤 하였다. 그 맛에 장날이면 엄마를 따라나서고는 했던 것이다. 없는 돈을 쪼개서라도 자식 입에 맛있는 것을 넣어 주시려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일 것이다. 마른논에 물드는 소리와 자식 입에 맛있는 것을 넣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신다는 부모님들이시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니 전통시장에 대한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추억의 서랍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어도 치울 수가 없다. 전통시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뜨신 엄마도 살아 있는 듯 떠올라 가슴이 아릿해온다. 전통시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가 느껴진다고 할까. 딱히 살 게 없어도 둘러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면 생각지 않게 살 게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니 전통시장에 가려면 만약을 생각하여 현금을 가지고 가야 한다. 전통시장에는 카드 단말기를 갖추고 있는 가게가 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아주 드물게 있긴 하지만).
장이 서는 날이니 정해 놓고 살 것은 없어도 구경을 나서기로 했다. 현금이 들어 있는가 지갑을 보았더니 하나도 없었다. 시장 가는 길에 있는 현금지급기에서 현금을 뽑기로 했다. 그런데 장날이라 그런가, 오늘따라 현금지급기 앞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네 대의 지급기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가장 적은 지급기가 있는 곳에 가서 줄을 섰다. 앞에는 서른을 갓 넘어 보이는(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지 모른다. 요즘은 나이 값을 안 하는 사람이 많아서) 여자가 서 있었다. 드디어 앞에 있던 사람 차례가 되었다. 끝나면 내 차례였다. 그런데 앞사람이 볼일을 마친 것을 보았는데 돌아서지를 않았다. 가만히 보니 한 가지 볼일만 보는 게 아니었다. 한 가지가 끝나면 또 다른 것을 하기를 반복하였다. 창구에서 보아야 할 일을 다 보는 모양이었다.
오래전, 공중전화를 많이 사용하던 때의 한 사건이 문득 떠올랐다. 앞사람이 통화를 너무 오래 해서 뒷사람이 항의를 했다. 그러자 화가 난 앞사람이 항의를 한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었다. 앞의 사람이 여러 가지 볼일을 보느라 한 마디 하려다 자칫 말 잘못하였다가 무슨 사단이 날지 모르는 세태라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앞의 여자는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두 가지도 아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많은 볼일을 봐야한다면 곁에 있는 창구로 가서 봐야 했을 것이다. 현금 지급기는 사람이 없을 때야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다릴 때는 간단한 볼일을 보며 서로 양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뒷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면 두 가지 이상의 볼일은 도저히 보지 못한다. 참다못해 최대한 부드럽고 예의 있는 어조로 한 마디 했다.
“저기요, 사람이 많을 때는 한 가지씩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 앞사람도 그랬어요. 저도 기다렸어요. 그러니 기다리세요.”
“아니, 그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다릴 때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최소한 "그녀가 죄송해요, 빨리 끝낼게요." 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엉뚱한 대답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녀는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할 일 한다는 식으로 내 말을 무시해 버리고 계속 자신의 일을 보았다. 어른에 대한 예의를 비중 있게 교육받은 우리 세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게 요즘 젊은이들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젊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참 씁쓸했다.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는 사람을 아예 무시하는 사람한테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볼썽사납게 싸울 수도 없지 않은가. 기분이 썩 안 좋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는 그러고도 연이어 몇 가지 볼일을 더 보았다.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마침내 그녀는 볼일을 다 끝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직 남은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현금지급기에서 획 돌아서며 나를 쏘아보더니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가만히 기다렸으면 좀 더 빨리 끝났지 않았겠어요. 괜히 시비를 걸어 더 늦어졌잖아요.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살다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하얗게 생각이 나지 않는 때가 있다. 그 사람 말마따나 이게 무슨 경우인지 짧은 순간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얼굴만 달아오를 뿐 이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무슨 경우냐고 물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잘못된 거 같은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이게 무슨 경우인지 생각은 해봐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경우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이럴 때 대답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예정에 없던 실랑이로 시장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어수선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 대답이 떠올랐다. 저녁에 먹을 반찬을 만들고 있는데 거짓말 보태 부모뻘 되는 사람에게 이게 무슨 경우냐고 묻던 말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무슨 경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