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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한여행 Sep 25. 2021

4. 남미에서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

장기여행을 하면 한 번씩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현타가 올 때가 있다. 주로 채소로 이뤄진 한국의 밥상과 달리 남미에서 주식은 대부분 고기와 빵 아니면 고기와 쌀로 이루어져 나물이 팍팍 무쳐진 비빔밥이 그릴 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항상 대도시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한인타운 또는 한인마트를 찾는다. 대부분의 남미 나라들의 수도에는 작게라도 한인마트가 있다. 정 없으면 중국 마트나 일본 마트는 항상 있다. 이런 데서 무조건 사는 두 재료가 있는데 간장과 고추장이다. 현지 마트에 가도 간장을 팔긴 하나 에콰도르랑 볼리비아 마트에서 봉변을 당한 적이 있어 그 후에는 웬만하면 아시안 마트에서 산다. 분명 salsa de soya 간장이라고 써져 있는 갈색 병을 샀는데 집에 와서 써보니 검정 색소 맛이었다. 무슨 맛인지 설명이 안 되는 진짜 검정 색소 맛이었다.


간장은 마법 소스처럼 설탕이랑만 섞어도 아시아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야채와 볶으면 감칠맛 나는 반찬이 되고 고기와 볶으면 불고기가 된다. 거기에다 현지 마트에서 사 온 엄청 싼 라면의 면만 넣고, 간장과 설탕만 섞어서 넣으면 그럴싸한 야키소바 같은 맛이 난다. 스파게티 다음으로 제일 많이 해 먹었던 게 이 간장 야채 볶음 라면인 거 같다.


여기서 한국의 맛을 온전히 더 느끼고 싶을 땐 고추장이다. 여행에 최적화된 요리는 닭볶음탕이다. 한 번에 야채와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고, 부엌 시설이 열악한 호스텔에서 냄비 하나면 끝나는 요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호스텔의 공용 주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서 눈치 보일 때도 있는데 모든 야채와 고기를 쏟아 넣고 양념만 넣어서 뚜껑만 닫으면 끝이라 이렇게 편리하면서 오감이 충족되는 요리는 또 없는 거 같다. 게다가 한국의 맛이라니. 근처에서 책을 읽다가 돌아오면 어느새 빨간 양념이 보글보글 환영하고 있다. 


양념으로 오로지 필요한 건 고추장, 간장, 설탕, 시장에서 산 마늘 조금. 사실 떡볶이 맛에 가까운 닭볶음탕이다. 고춧가루를 넣어야 하지만 남미의 한인 마트나 중국 마트에는 이상하게 고추장은 많이 파는데 고춧가루를 찾긴 어려웠다. 현지에서 이렇게 밥 해 먹으면 비용절감까지 된다. 현지 재래시장에서 야채와 닭 같은 식재료는 엄청 싼데 이렇게 한번 만들면 푸짐한 몇 끼가 금방 완성된다. 닭 가슴살, 양배추, 양파, 고구마나 당근을 사서 넣고 물, 고추장, 간장, 설탕과 다진 마늘을 넣으면 그럴싸한 닭볶음탕 완성.


솔직히 해외에서 오랜 기간 여행하면 고추장에 물만 타도 맛있긴 하다. 


남미를 1년 넘게 여행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떡볶이 맛 닭볶음탕의 마스터가 돼서 돌아온 것 같다.


누군가

"남미 여행에서 뭐를 가장 크게 배웠나요?"

하면

"고추장 닭볶음탕을 섭렵했습니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하면서 직접 요리해서 먹은 음식은 주로 간편한 음식으로, 야채 볶아서 스파게티 소스만 부어도 되는 파스타, 간장, 설탕이 들어있는 볶음 요리들 그리고 특별한 날에는 닭볶음탕을 먹은 것 같다. 고추장은 항상 애지중지 아껴 먹어야 했다. 언제 또 대도시에 도착할지 모르니.




한 번은 아르헨티나에서 칠레 국경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경찰 같은 분이 올라오더니 엄청난 빠른 말로 뭐라 뭐라 하면서 다들 밖으로 내보내는 게 아닌가.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주섬주섬 나갔는데 알고 보니 버스도 비행기처럼 국경에서 세관을 통과해야 됐다.


그때 모든 가방을 다 열어서 확인했는데, 우리 가방에서만 끊임없이 요리 재료들이 나왔다. 고추장, 김치, 올리브유, 설탕, 간장 등 다양한 식재료들이 나왔는데 누가 보면 무슨 마스터 셰프 찍으러 온 요리사인 줄 알겠더라. 그때 마음이 너무 아프게도 대도시에서 갓 사온 김치와 이별을 맞이했다. 한 요원이 냄새를 맡고 "헉" 하더니 다른 요원들을 불렀다.


"Que es esto?" 이게 뭐야?

"Es verdura picante!" 매운 채소야!

"Que?" 뭐라고?

"Verdura... Coreana...?" 한국... 채소...?

"..."

"Puedes probar!" 먹어봐도 돼!


그렇게 한 명이 작은 조각을 먹더니 엄청 맵다고 물 달라고 했다. 이런 매운걸 어떻게 먹냐고. 세명의 요원들이 이게 도대체 뭐냐고 하며 우리 다 같이 빵 터진 게 잊히지 않는다. 채소는 웬만한 나라들은 출입 불가이다. 우린 버스로 이동해서 아무 생각 없이 자다가 봉변을 당했지만 운 좋겠도 고추장은 통과가 됐다. 고추장 닭볶음탕의 여정은 계속된다.




한 번은 페루에 있는 작은 마을인 쿠스코라는 곳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쿠스코는 마추픽추를 가기 전 몸을 추스르는 도입지로 많은 여행자들이 지내고 있는 곳이다. 여행 기간이 짧은 분들이 페루 수도인 리마로 들어와 고산병을 심하게 겪는 마을이기도 하다. 안데스 산맥에 해발 3,400 미터의 고도에 있어 여기서 잘 적응해야지 순조롭게 마추픽추를 갈 수 있다. 쿠스코의 히피 같은 여유로운 분위기에 반해 며칠 일정을 몇 주로 바꾸는 여행자들도 꽤 있다. 리마 같은 대도시의 삭막한 회색 빛깔의 느낌이 아니라 알록달록 뭔가 동화에서 나오는 마을 느낌이라 그렇기도 한 거 같다. 아기자기함에 약한 나는 쿠스코에서 한 달 반 정도를 머물렀다. 


그렇게 매일 같이 장을 보러 재래시장에 갔는데 우리가 한국시장에서 볼 수 있는 뽀얗고 길쭉한 무를 팔고 있는 게 아닌가. 여태까지 보인 무들은 서양에서 볼 수 있는 동그란 무들 밖에 없었는데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냉큼 샀다. 무말랭이 모양으로 늘씬하게 잘라서 묵고 있는 호스텔의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실험 삼아 말려봤다. 일주일이 지나 신기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무말랭이 비주얼이었다. 무말랭이 만드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마치 아인슈타인이 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작은 쿠스코 마을 어디서도 우리가 아는 한국의 매운 고춧가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꿩보다 닭이라고 재래시장에서 유일하게 제일 빨게 보이는 고춧가루를 샀다. 그의 이름은 cayenne pepper 카옌페퍼. 제일 곱고 빨개서 샀더니 배신당했다. 이 고춧가루는 특이한 향이 있어 뭐에 뿌리기만 하면 섬에서 노래 부를 것 같은 이국적인 음식으로 변신시켰다. 그래도 무말랭이에 버무리면 특별한 음식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며 보이지 않는 빛줄기에 희망을 두며 진행했는데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너무 맛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씻어내 간장과 식초와 설탕에 버무려 급히 장아찌로 탈바꿈했다. 어김없이 다시 나타난 구세주 간장과 설탕. 하루를 지나니 어느새 맛있는 오도독 식감의 장아찌가 되어 밥과 닭볶음탕과 흡입했다. 말리는 건 일주일 넘게 걸렸는데 먹는 건 몇 분이라니. 이게 인생인가.




남미에 있는 나라들의 수도에 도착하면 짐부터 풀고 찾는 건 한식이다. 대부분의 한식 식당들은 현지식보다 가격이 4배 정도는 하지만 먹는 기쁨도 10배를 만끽할 수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한식집은 볼리비아 라파즈에 있던 곳인데 너무 맛있어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세 번이나 갔었다. 한국 음식의 다양성이나 질을 따지면 단연코 칠레 산티아고의 한인 타운이 최고다. 심지어 짜장면과 탕수육도 있다. 한국 반찬도 종류별로 팔고 있다. 산티아고의 평안하면서도 깨끗한 분위기에 빠져서 3개월 넘게 있었는데 솔직히 지금 와서 보니 한인 타운이 있다는 점도 컸던 거 같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한식을 찾지 못하는 도시에서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남미식 중국요리인 chifa 식당들을 찾는다. 실패할 수 없는 메뉴는 arroz frito인 볶음밥 그리고 lomo saltado인 고기 야채 볶음 덮밥이다. 특이하게도 감자튀김도 가끔 같이 볶아서 나오는데 소스에 눅눅해진 그 감자튀김과 고기와 야채의 조합이 진짜 맛있다. 남미에 있는 나라들 대부분 날리는 쌀을 써서 그런지 볶음밥이 더 맛있다. 그 밥알 하나하나 기름에 코팅된 짭조름한 행복이란. 가끔 돈을 쓰고 싶은 날에는 sopa de wonton 완탕 국을 시키는데 이건 너무 케바케라 외지에 있는 도시에서는 안 시킨다. 아무래도 보급형 냉동 완탕을 넣는 곳이 많아서 실망스러운 밀가루 덩어리가 나올 때도 많다. 


남미에서 제일 맛있게 먹었던 한식을 꼽으라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 가성비 갑이었던 곳은 아르헨티나의 한 불고기집이다. 1인당 15,000원 정도 했었는데 여기가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소고기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곳인데 그 소고기로 만든 짭조름하고 달달한 불고기 무한리필 집이라니 환상적일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수 없이 많은 반찬들에 이미 감동을 받고 계속해서 나오는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불고기에 눈물이 난다. 보고 싶었다 한식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추장에 물만 풀어도 맛있는 게 여행인 거 같다.


지금이나 그때나 참 열심히 먹고 다닌 거 같다. 역시 나는 먹기 위해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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