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늘 엄한 존재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 와이셔츠 주머니에 노란 쪽지가 보였다. 그게 뭘까 궁금해서 손을 넣었다. 미리 물어보지도 않고 어른 주머니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호되게 혼이 났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가족여행으로 경주에 갔었다. 아버지가 차를 운전해서 서울에서 경주까지 갔다. 그 당시에는 차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 다녔고 한여름이어서 정말 더웠다.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운전을 하던 아버지는 그런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혼을 내셨다.
아버지는 화가 많으셨다.
큰일이 아닌데도 벌컥 화를 내는 일이 많았다. 가족들에게는 물론이고 가끔 만나는 친지들에게도 그랬다. 작은 이모네 가족과 만나기로 한 날, 이모네 가족이 약속시간에 늦게 오셨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던 건지 아버지는 음식점에서 작은 이모네 가족에게 '매번 늦는다'며 화를 내셨다. 그 상황에서는 모두 무안해했지만 아버지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다행히 관계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나이가 드신 요즘까지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늦을까 봐, 화를 내실까 봐 늘 신경이 쓰인다.
오랜만에 동생이 와서 온 식구가 함께 외식을 했다.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다가 어릴 적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 집들은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훈육을 하지 않고 예뻐하기만 하셔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듣는데 우리 집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다 엄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유아 시절 6.25 전쟁을 겪으시고 7남매 중 막내였지만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귀여움을 받지 못하셨다고 한다. 6살 때 아버지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가 자주색 옷을 가져다주셨는데 아버지는 색깔 때문에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 입겠다고 하셨단다. 다른 색깔로 바꿔다 주실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두말없이 가져가시고 그걸로 끝이었다. 6살 때 기억이 70대인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 보니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저녁을 먹으면서, 초등학교 때 가족끼리 갔던 경주여행에서 무더위에도 물을 마시지 못한 이야기와 비슷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면서 미안해하셨다. 그러면서 눈물까지 보이셨다.
아버지는 본인이 그런 환경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자신이 보고 배운 대로 자녀들을 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아버지 자신도 아버지 역할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절에는 부모교육도 없었을 테니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엄마 역할이 처음인 내가, 내 아이에게 과거에 했던 말이나 행동으로 미안함을 느끼듯이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다.
언제든 화낼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를 보니 이제 많이 노쇠해지셨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렸다.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화를 내지 않고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감사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쌓여있던 날카로운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