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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Nov 07. 2021

노안老顔

 노안老顔이라는 단어가 있다. 더 정확히는 노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나도 노안이다. 아니 노안이었다. 내 나이 현재 43살이다. 누가 봐도 40대 아저씨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지금은 나이에 맞게 40대 아저씨로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은 나이는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18살이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아직 학생인데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인데, 숫자상으론 이팔청춘은 아니지만 의미상 이팔청춘인데 아저씨라니….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황당했던 것 같다. 더 그랬던 건 길에서 마주친 전혀 모르는 사람이 길을 물어본다고 아저씨라고 불러서 일 것이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아저씨라니. 물론 모르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마땅치 않았기에 그 사람은 별 의미 없이 아저씨라는 호칭을 썼을 것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기요’도 있고, ‘학생’도 있는데 굳이 아저씨라니! 나는 그 재서야 내가 노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8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단어 ‘노안’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공교로운 건 그때부터 나이에 맞지 않게 몰래 담배를 피우던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려 보이는 사람이 담배나 술을 사려하면 신분증을 확인한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는 이런 부분들이 조금 느슨했다. 그리고 현재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교에 진학을 해서 고등학생이면 아직 어린 학생으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다 큰 성인이라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만 19세가 넘으면 법적으로 성인이 맞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 더 많은 고등학생들이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생 신분을 이어 가고 있다. 법적으론 분명히 성인임에도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란 신분으로 인해 사회적 인식은 아직 성인은 아니다 라고 인식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 것 같다. 여하튼 당시 사회적 인식 상으론 성인에 근접한 고등학교 2, 3학년 학생 정도면 적당히 술도 마시고 술보다는 엄격했지만 담배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노안이었던 내가 담배를 사러 가면 가게 주인은 적당히 한 두어 번 훑어보고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팔았다. 의도치 않게 요즘 표현을 빌면 ‘담배셔틀’이 됐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소위 ‘일진’이라는 놈들한테 휘둘려 담배를 사다 바친 건 아니었다. 엄연히 친구들의 정중한 부탁이었다. 물론 내 노안에 기댄 부탁으로 씁쓸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에 내 마음은 그냥 그랬던 것 같다. 옳은 방향은 아니지만 나름 친구들을 도와(?)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나는 노안으로 누가 봐도 담배를 많이 필 것처럼 보였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꼭 노안이었기에 그랬던 건 아니겠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보통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에게 담배를 권했다. 괜찮다고 거절하면 그다음에 따라오는 질문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끊었어요?’였다. 그럼 난 ‘아닙니다. 이래 보여도 애초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하고 대답을 했다. 그럼 또 되묻는다. ‘아니 군대에서도 안 피웠어요?’하면 난 또 ‘네’하고 대답을 하며 서로 멋쩍게 웃곤 했다.     

 


 노안과 관계된 이야기라 했는데 너무 옆으로 샌 것 같다. 다시 노안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 이후에 고등학교 졸업 전후로 노래방에서 알바를 했다. 지난 일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글로 쓰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한창 멋 부릴 나이였는데 노안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멋을 부리는 이유는 이성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기 때문인데 노안이라 의기소침해진 경우도 많았다. 의기소침보다는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짜증을 넘어 화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     

 


 억울했다. 내가 바랐던 노안이 아닌데 이렇게 태어난 건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하고 어린 나이에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다. 우스운 일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뭐 대수라고 신세한탄까지…. 하지만 그 나이의 나에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 신세한탄을 한 번은 알바를 하던 노래방 사모님에게 했던 것 같다. 그때 사모님의 한 마디, ‘걱정 마요. 어릴 때 노안인 사람이 그 얼굴 그대로 가져가서 나이 들면 오히려 젊어 보여요.’ 정말 그럴까 싶었다. 그냥 으레 해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다.     

 


 안 그래도 노안인데 여드름 피부여서 더 그래 보였던 것 같다. 여드름도 참 할 말이 많지만 따로 풀어 내 보도록 하겠다. 여하튼 20대 후반까지는 언제나 항상 주변 사람들이 실제 나이보다 많게 봤다. 그런데 20대 후반을 넘어서는 시점부터 천천히 본래 나이로 봐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게 30대 초반을 넘어서기 시작하니 실제 나이보다 오히려 한 두 살 어리게 봐주는 것이 아닌가?     

 


 고등 시절부터 인식을 했으니 10여 년 넘게 노안으로 살아왔는데 어리게 봐주다니 이게 뭐라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이야기를 해주신 혹은 예견을 하신 사모님이 생각이 났다. 이미 알바를 그만둔 지 꽤 돼서 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몰랐는데 그때의 그 응원(?)은 다시금 떠올라 마음으로나마 분명히 고마워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내 얼굴은 시간을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다. 30대 초반을 넘어서는 시점엔 한 두 살 어리게 봐주던 것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격차가 벌어져 갔다. 지금은 43살이란 나이지만 보통은 많이 봐야 30대 후반 정도로 봐주는 것 같다.     

 


 우선은 기분 좋은 일이다. 젊게 봐주는 데 특별히 싫어할 이유가 없다. 특히 노안이란 소리를 꽤 오래간 들어온 나로선 더 기분 좋은 일임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 기쁘고 그런 건 또 아니다. 물론 처음 역전됐을 땐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노안으로 살아 보고 시간의 흐름에 의해 역전을 겪은 뒤엔 오히려 젊어 보인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두 가지 상황을 다 겪었지만 이러나저러나 나이를 먹는 건 매한가지였다. 노안이 주는 고통(?)이 있고, 동안童顔이 주는 나름의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나이를 먹는 것이고 어느 쪽이나 보여지는 얼굴이 그 사람의 근본을 이야기할 순 없다. 돌아 생각해보니 노안이건, 동안이건, 주름이 있건 없건 간에 결국엔 내 모습이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문제들이다. 노안이었던 나도, 역전을 한 나도, 지금 현재 눈가에 주름이 적잖이 있는 나도 모두 나라는 사람의 한 모습일 뿐이다. 어느 하나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런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나란 존재를 설명하는 것일 텐데 부정을 해서도 안 된다.     

 


 물론 어떤 모습은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런 고통 역시 내 삶의 일부임을 이해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안이 뭐 대수라고 더 고통스러운 상황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진정한 고통을 안고 있는 분들에게 죄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죄스러운 마음에 급히 글을 마쳐야겠다.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들이 너무 많으니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여유 있는 마음을 앞으로 더 많이 가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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