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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19. 2022

끝없는 용기와 지혤 달라고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아마도 이렇게 따라 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동년배!!! 반갑습니다. 참 좋은 노래입니다. 듣기로는 학교 음악교과서에도 실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노래 가사를 다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아마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끝없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는 그런 내용일 겁니다. 아니어도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그런 끝없는 용기 그리고 지혜가 필요하니까요.



 때는 바야흐로 일천 팔백 몇 년쯤이라고 해야만 할 것 같은 수사입니다. 사실은 2005년 전후 일 겁니다. 한창 대학생 신분으로 카페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입니다. 커피를 좋아해서 혹은 커피를 배우고 싶어서 카페 알바를 한 건 아닙니다. 그냥 할 만한 조금 수월한 일거리를 찾다 자리를 잡은 경우입니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부터 노래방 알바를 했는데 생각보다 조금 힘들었습니다. 보통 손님들이 식사나 술을 드시고 2차로 노래방을 많이 오시는데 꼭 본인들이 드신 걸 확인하면서 노래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 그걸 치우려면 참 고역이었습니다. 그러니 술집 알바는 더더욱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커피의 ‘커’자도 모르던 믹스커피조차 마시지 않던 제가 카페 알바를 시작한 지 근 2년 정도 흐른 시점일 겁니다.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바닥과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해 서빙을 했습니다. 지금이야 서빙을 해 주는 곳이 거의 없지만 그때는 거의 다 서빙을 해줬습니다. 보통은 하기 싫어하는 청소도 은근히 할 만했습니다. 서빙은 생각보다 묘한 뿌듯함을 줬습니다. 특히, 많은 음료를 한 번에 서빙해내면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유리컵, 머그컵 그리고 높은 컵 등을 한 번에 대여섯 잔 서빙해내면 손님들이 그렇게 좋아라 했습니다. 서커스를 보는 듯 한 그런 느낌이었나 봅니다. 많은 주문을 특별히 메모하지 않고 다시 확인해드리면 그 역시 손님들이 대단하다면서 좋아했습니다. 동물원의 신기한 동물을 보는 그런 시선이 아닌 아! 이 알바는 일을 잘하는 알바구나. 신뢰가 가는구나. 그런 신뢰의 눈빛이었습니다. 웃기지도 않게 저의 인정 욕구를 채워 주는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진짜 재미는 커피를 만드는 자체였습니다. 처음엔 허드렛일만 하다 차츰 레벨 업을 하듯이 과일을 다듬고 생크림을 만들고 바쁠 때는 간단한 음료부터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음료들은 레시피대로 블랜더에 모든 재료를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참 쉽쥬?(백종원 이 양반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ㅎ) 그렇게 어느 날인가 드디어 에스프레소 머신을 잡게 됐습니다. 이 지점이 뭐랄까 당시의 상황에선 그 카페가 조금 남다른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카페들이 커피전문점이라는 카페들이 우후죽순 들어 선 건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2007년 전후일 겁니다. 그때 무슨 사건이 있었느냐? 바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방영이었습니다. 아마도 확실치 않지만 그 드라마 방영 이전엔 직업으로서 ‘바리스타’라는 명칭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커피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지 특별한 호칭은 없었습니다. 커피와 관련된 직업명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딱히 긍정적인 이미지는 없었던 ‘다방 레지’가 전부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드라마 방영 이후에 아마도 전 국민이 거의 처음으로 바리스타라는 걸 알게 됐을 겁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커피전문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개인이 카페를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프랜차이즈 브랜드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 커피전문점 프랜차이즈는 ‘할리스 커피’ 일 겁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매장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근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브랜드들이 명멸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는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건재한 그런 브랜드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입니다.



 알바를 한창 하던 시절은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이어서 전 그냥 카페에서 알바를 조금 오래 한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약간의 능력이 있는 알바생일 뿐이었지 아직 바리스타는 아니었습니다. 아니라기보다는 그런 호칭을 몰랐기에 쓰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지역의 카페는 보통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었습니다.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내린다든지, 우유를 가스레인지로 데운다든지 하던 시절에 그 카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싸구려 머신이긴 했습니다만 어찌 됐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카페가 커피 맛에 진심인 그런 카페는 아니었습니다. 대학가에 있는 흔한 카페였습니다. 낮엔 커피와 음료를 팔고 밤엔 가벼운 안주와 맥주도 같이 파는 카페였습니다. 그럼에도 카페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무나 커피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잡고 커피를 만든다는 것은 레벨 업이 끝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카페 알바의 끝판왕. 이제 다음은 그 카페를 제가 사는 건데 그럴 돈은 없었습니다. 



 여하튼 커피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당시엔 멋도 모르고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만들었고, 우유 거품을 내는 것이 모든 것인 줄 알았던 카푸치노를 만들었습니다. 라떼와 카푸치노의 차이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커피전문점의 커피 관련 모든 음료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머신을 다룬 다는 것은 카페의 거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배에 선장이 있다면 카페엔 머신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지금이야 워낙 보편화돼서 누구나 카페 알바를 하면 다루는 것이 머신이긴 합니다만 당시엔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커피전문점 역사의 태동기에 지역에서 그 역사를 같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쓰고 보니 조금 과한데요. ㅋ)



 그즈음 문득 대학을 졸업하고 커피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카페 일을 하며 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구체화시킨 도전이 바로 ‘스타벅스 지원’과 ‘테라로사 지원’이었습니다. 커피 공부를 나름 제대로 해 보고 싶었는데 마땅한 경로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바리스타 학원도 많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바리스타라는 직업명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엔 일을 하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스타벅스와 테라로사였습니다.



 제가 사는 청주는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닙니다. 당시엔 더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 스타벅스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청주보다 큰 도시였던 대전에도 아마 스타벅스가 없던 시절이었을 겁니다.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려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뭐 물론 지금도 스타벅스에서 단순 알바가 아닌 제대로 일을 하려면 서울에서 먼저 일을 해야 할 겁니다.



 서울을 가야 하는데 돈도 없고 뭐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할 대상은 엄마밖에 없었습니다. 참 못나게 500만 원만 달라고 했습니다. 어린 생각에 명확한 정보도 없이 500만 원 정도면 서울에서 1년 정도 고시원에서 살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참고로 2000년 초반 이야기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이 때 아닌 떼를 쓰니 엄마도 당황했을 겁니다.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학교까지 보내 놨더니 장남이란 놈이 다방 레지나 타는 커피 일을 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당시의 소위 다방 레지라고 불리던 분들의 삶 자체를 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이야기 한 부분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떼를 쓰다 포기했습니다. 참 부족했습니다. 정말로 원했다면 보다 용기가 있었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한 두 달 버틸 돈은 스스로 마련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사고 치듯이(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서울에 올라가서 스타벅스에서 일을 했다면 제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상상을 지금도 약간의 회한과 함께 하곤 합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참 별일 아닌데 그냥 올라갔어야 하는 건데 뭐가 그리 무섭고 두려웠는지 그리고 고작 한다는 행동이 다 큰 놈이 엄마한테 떼쓰며 돈 달라는 거였습니다. 정말 두려움 외엔 용기도 지혜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테라로사 지원은 더 바보 같았습니다. 지금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국에 걸쳐 매장이 있습니다만 당시엔 강릉 본점 밖에 없었습니다. 즉, 일을 하려면 이번에도 역시 청주를 벗어나 강릉에 가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테라로사는 숙소를 제공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질 못 했습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숙소까지 제공을 해 주고 커피를 배우면서 일을 하니 급여까지 받는 일인데 도대체 뭐가 무서웠는지 가질 못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스타벅스도 스타벅스지만 테라로사에 가지 않았던 것이 참 후회가 됩니다. 살아오면서 돌아보면 참 바보 같은 선택을 많이 했는데 아마 이 선택이 그중에 수위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찌 보면 커피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딱 그 정도여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30대 초중반에 커피 일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커피는 제 삶에 많은 것들을 던져 줬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커피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도 많은 두려움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핑계지만 그때보다 나이도 차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으니 더 두렵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찼던 20대의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듯이 앞으로 또 20여 년이 지나 60대가 된 제가 지금의 저를 돌아보면 또 바보 같았구나 하는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끝없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법의 성을 지나고 늪을 건너기 위해 오늘도 부족하지만 노력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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