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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an 28. 2024

까 주스

https://groro.co.kr/story/8079



 난 아침을 안 먹는다. 특별한 취향이나 성향 혹은 어떤 인식에 의해 안 먹는 건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 안 먹는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 안 먹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엄마가 챙겨줘서 먹었다. 그럼 대학교 때부터는 엄마가 챙겨주지 않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대학생이 돼서 자취 혹은 독립 비스무리한 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엄마는 아침을 챙겨 줬다. 아니 챙겨 주려 했다.



 다만 대학생이 됐다고 술을 처... 아니 마시러 다니고 늦게 들어오게 되고 숙취 등이 생기고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불규칙적이면서 상대적으로 늦게 학교를 가게 되면서 밥보다 잠을 선택하게 된 결과다. 그 이후로 결혼하기 전까지 아침을 안 먹었다. 생각이 잘 안 나지만 결혼한 후에도 특별히 아침을 챙겨 먹진 않은 거 같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아침에 따뜻한 국에 밥을 먹어야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어서 같이 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침을 먹는다. 가벼운 아침을 먹는다. 사실 아침을 먹는 다기보다는 남는 무언가를 주워 먹는다. 바로 아내가 딸아이 아침을 준비하고 남는 거 혹은 딸아이가 먹고 남긴 거 등을 주워 먹는다. 이제 37개월인 아이가 먹는 아침이라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보통은 과일, 견과류, 빵, 삶은 계란, 치즈 그리고 있으면 구황작물을 준다. 구황작물은 뭐랄까 조금 웃긴 거 같다. 쌀이 부족한 시절을 지내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쌀이 부족할 때 살기 위해 먹은 구황작물이 지금은 풍족한 현대인들의 건강을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다. 여하튼 이래저래 사람 살리는 고마운 구황작물이다.



 이마저도 최근부터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 젓, 분유, 이유식 등을 먹어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더 커서 간을 하지 않은 재료 본연의 맛이긴 하지만 어른들이 먹는 식재료를 그대로 먹기 시작할 때부터 준비하고 남은 것과 아이가 먹고 남긴 걸 주워 먹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 아침을 준비하는 길에 아내가 내 것도 조금씩 챙겨주곤 했다. 아니면 내가 옆에서 명절에 붙인 전 한 두어 개 주워 먹는 것처럼 주워 먹었다.



 그러던 아내가 뭘 봤다. 뭘 보고 나서 선언을 했다. 내일 아침부터 ‘까 주스’를 챙겨주도록 하겠어! 까 주스! 뭘 깐다는 거지? 그 까는 CCA를 읽은 것이다. CCA는 당근, 양배추, 사과를 뜻 한다. 그렇다. 몸에 좋다는 당근, 양배추, 사과를 득득 갈아 아침에 마시게 해 주겠다는 거였다. 알았다고 했다. 딱히 싫어하는 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었다. 과일 중에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고 독특한 향이 있지만 달다구리 한 당근도 가끔 간식 삼아 먹어 왔다. 그리고 별 맛이 없는 양배추도 드레싱 맛이긴 하지만 돈가스 등을 먹을 때 많이 먹었다.



 문제는 같이 갈아낸 자체였다. 각각은 다 먹을 만한 괜찮은 재료들인데 이게 다 같이 갈려 버리니 양배추가 모든 걸 잡아먹었다. 색도 식감도 맛도 별로인...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 안 좋은 것들을 몸에서 몰아내는 까내는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동시에 입맛도 까 버렸다. 하지만 챙겨주는 아내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안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마셔 버렸다. 이제 먹은 지 며칠 안 되지만 영 적응이 되는 맛은 아니다.



 문득 그냥 따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나 당근 그리고 심지어 양배추까지 생으로 그냥 먹을 때 다 아삭한 식감을 가지고 있는 재료들이다. 좋아하는 과일들이 많지만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삭한 식감 때문이다. 양배추는 아삭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흐물흐물한 식감은 아니다. 그래서 어! 이거 그냥 다 따로 먹어도 괜찮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한 번 건강을 위해 안 좋은 걸 까 버리는 그래서 입맛도 까 버리는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한 번 갈기 전의 재료를 달라고 해서 그냥 먹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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