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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0대 초반의 나이로 백수가 됐다. 자발적인 백수였다. 하던 일이 죽기보다 싫어 때려치우고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우선 그만뒀다. 때려치우고 나가서 뭘 어떻게 할지 등의 체계적인 계획보다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30대의 패기, 아니 객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객기마저 부릴 수 있는 상황이 부럽다.
2011년 6월, 즐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알바를 시작해서 대학생 시절 내내 알바를 하고 대학교 역시 졸업하기 전에 취업이 됐다. 해서 고3 수능을 보고 난 이후로 2010년 12월에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딱히 쉰 적이 없었다. 그런 삶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30대 초반의 나이에 백수 생활이 마냥 즐거웠다.
2011년 9월, 즐거운 마음은 딱 6개월 갔다. 현실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냐? 우울했다. 아! 이렇게 우울증에 걸리는 거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마음이 깊어지면 뭔 일이 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만큼 묘하게 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상황을 나의 상황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2011년 11월, 이전에 올려두었던 이력서를 누군가 봤는지 연락이 왔다. 뭐지 싶었다. 카페에서 일을 하겠다고 올려 둔 이력서인데 사실 별 기대가 없었다. 20대 중후반만 돼도 나이가 많다고 하는 곳이 카페였다. 혹시나 아니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으로 올려 둔 이력서인데 마침 외곽에 있는 카페고 조금 늦은 시간까지 책임져 주고 가게를 맡아 줄 나이가 조금 있는 남자를 그것도 자차가 있는 남자를 찾는 곳이었다. 그래서 연락이 왔고 일을 시작했다.
2014년 12월, 몇 군데의 카페에서 더 일을 했고 커피학원에서 강사로도 일을 했다. 재미있었다.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혹은 커피학원에서 강사로 삶을 살아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쪽 업계가 보통 그렇듯이 급여는 짰다. 상당히 짰다. 능력의 여하를 떠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대한민국의 남자가 받기엔 상당히 짰다. 즐거웠지만 역시 다시 한번 우울했다.
2015년 1월, 결혼을 반드시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적은 없다.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뭐 이랬는데 뭐랄까 호기심이라고 해야 될까? 누구나 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정도로 결혼을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고 해도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가난에 의해 사랑은 쥐도 새로 모르게 뒷문을 열고 나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상대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뭐 혼자 살지 그랬던 거 같다.
2015년 2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시작했다. 커피 일은 아니다. 재미있었는데 급여가 너무 짰고 재미있었는데 뭐가 안 보였다. 결혼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을 안 한 걸 넘어 그냥 혼자 살 수도 있다라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커피 일을 접고 돈이 조금 더 되는 일을 찾았고 시작했다.
2015년 6월, 동료 한 명을 만났다. 특별할 거 없는 사이였다. 친하게 지냈다.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그냥 친해지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먼저 일을 시작한 선배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간간히 도와주면서 나이도 조금 더 있었기 때문에 굳이 표현하자면 인생 선배로서도 조언 아닌 조언, 아니 아니 그냥 대화를 편하게 많이 했다.
2016년 8월, 그냥 편했던 가끔 도움을 필요로 하면 도와주었던 동료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거 같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결혼을 목적으로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좋은 남녀관계가 조금은 더 가까워지길 바랐을 뿐이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의 계획이란 걸 세웠다. 여름휴가 기간을 활용해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섯 곳 정도의 장소를 다녀왔던 거 같다.
2017년 11월, 여자 친구가 아빠가 한 번 보자고 하셨는데 어쩔 거냐고 묻기에 어... 저... 그... 봐야지, 아니 인사드려야지 그래 알았어하고 당시 여자 친구의 부모님, 지금의 장인장모님과 밥을 먹었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었지만 숨길 것도 없어 물어보시는 부분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맛있게 밥을 먹었다.
일사천리
2018년 5월, 결혼했다. 결혼이라니... 포기라는 단어를 쓰기엔 조금 그렇지만 냉정하게 거의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결혼을 하다니... 결혼을 목적으로 두지 않고 만난 사람인데 어느 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어~ 하는 순간 예식장에 들어갔다. 뭐가 기분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신기했다. 기분이 좋았고 꿈만 같았지만 신기했다. 내가 결혼을 하다니...
2018년 7월, 대를 이어야 한다느니, 결혼을 했으면 그래도 애를 낳아야 하느니 하는 등등의 말 중에 내가 하나라도 귓등으로 들은 말은 없다. 아니 저기 결혼도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애도 낳고 싶으면 낳는 거지 꼭 그래야만 하는 게 어딨어? 조선 시대여? 대를 이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책임 뭐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포기했던 결혼을 했으니 그 자체로 만족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아내와 사랑하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2019년 1월, 물론 아이를 절대 낳지 않겠다. 뭐 이런 건 또 아니었다. 소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딩크족 같은 것도 싫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낳으면 낳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걸 뭘 또 낳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선언까지 할 일인가? 본인들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결정을 하는 데 있어 그리 자신이 없나? 뭘 선언까지 하고 있어.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내 마음대로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즐겁게 열심히 살면 되지.
2020년 4월, 아이가 들어선 걸 확인했다. 코로나 한 복판의 일이었다. 여러 모로 신기했다. 아직 결혼한 사실 자체도 신기했는데 아이라니... 더불어 코로나라는 엄중한 시기에 웃기지도 않게 승진까지 했다. 분명히 좋은 일들이 겹쳤는데(코로나는 내가 뭐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를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쁜 건 둘째치고 신기했다.
2020년 12월, 아이가 태어났다. 딸이다. 내 팔뚝만 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있으려니 꿈만 같았다, 아니 그냥 꿈이었다. 현실과 분간하기 힘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내 팔에 내 팔만한 아이가 안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2024년 8월, 아내와 사귀기 시작한 지 8년이 됐다. 아내와 결혼을 한지는 6년이 넘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는 43개월이 지났다. 지난 8년이란 시간 동안 아내와 2년 조금 안 되게 연애를 했고 결혼 후 2년 조금 안 되게 신혼생활을 즐겼으며 코로나 한 복판에 아이를 가져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지금 만으로 3세, 43개월을 넘어가고 유치원은 5세 반에 다니고 있다. 최근에 폐렴과 휴가 등이 겹쳐 3주 간 유치원에 안 가고 있는 아이가 내 눈앞에서 까불거리며 종알종알 떠들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책도 읽고 떼를 쓰는 모습을 거의 매일 매 순간 보고 있음에도 신기하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니... 8년 전 아내와 사귀기 시작한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시간이동 시켜 놓으면 아마 입이 하마만큼 커졌을 것이다. 결혼도 결혼이지만 딸이라니... 결혼이야 어찌 보면 다 완성이 된 작품들끼리 뒤에 눈이 맞아 만나 잘 살아 보자 하고 성인으로서 합의를 한 건데 아이는 이 세상에 없던 그것도 생명을 만들어 낸 거라 원해서 계획적으로 만들어 냈든 자연스럽게 생겼든 간에 너무나도 신기한 일인 거 같다.
책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지만 책 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스펙터클 하며 그림보다 더 많은 감동을 주는 결혼과 아이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 중에서 8년이 만들어 낸 작품,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