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근이 Nov 01. 2020

15. 호주 약사 시험 어렵나요?

재시험 이야기


두 번째 시험 준비 시작-


 

처음보다 더 의욕이 있었다. 이 비싼 시험을 제발 이번을 마지막으로 끝내고 싶었다. 지난 시험에서 영어 단어가 턱없이 부족해서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풀지 못했던 답답함을 생각하면서, 용어 공부부터 다시 했다. 그리고 네이버 지식 백과사전과 위키피디아 영어 백과사전.. 두 선생님과 함께 질환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다져가면서 약물 공부를 재정비했다. 



어떨 땐 뭔가 새로운 공부를 하는 것 같아 재미있기도 했다. 시간만 많다면 더 깊이, 더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안다. 시험이라는 목표와 시간 제약 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즐겁게 공부할 날은 오지 않을 테지.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너무 얕게 훑어보지도 말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그런 ‘시험공부’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2월 중순, 다음 시험 일정에 대한 안내 메일이 이번엔 생각보다 일찍 왔다. 시험 날짜는 다행히 3월 초가 아닌 말로 잡혔다. 지난번엔 시험 일정을 거의 한 달 전에야 알려줘서 쫓기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번엔 그래도 세 달 이상 남은 것이니, 여유가 좀 있었다. 법무사님은 혹여나 또 다른 실수가 있을까 하는 마음인지 시험과 관련된 사소한 이메일까지도 모두 전달했는데, 그렇게 세 달 동안 받은 이메일이 10통이나 되었다.  2015년부터는 종이 시험에서 컴퓨터 시험으로 바뀌어서 그와 관련된 메일이 대부분이었고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뭐 덕분에 시험에 대한 긴장이 느슨해지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시험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유가 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고작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또다시 준비되지 않은 기분과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분명히 지난번보다 더 많이 공부한 것이 맞는데, 머릿속은 그냥 허했다. 공부할 것이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보지 않은 부분만 걱정되는 느낌.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하나가 바로 튕겨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진짜 이대로 시험을 치러가도 되는 건지 불안하기만 한.. 그런 느낌적인 느낌. 



시험이란 것은 항상 이런 것인지.. 언젠가는 준비된 기분으로 시험을 치러 갈 날이 있기도 할는지.. 하긴, 그런 날이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내 인생에서 시험이 없어질 날을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시험 앞에서 작아지기만 하는 나를 일으켜주는 건 옆에 있는 B였다. 언제나처럼, 이번에 꼭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음이 또 있다고 말해주는 B가 있어서, 내가 하기 싫다고 말하면 그래,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B가 있으니까… 힘을 냈다. 남은 열흘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책상 앞에 앉아 마음을 다 잡고 공부를 마무리했다.



 







일요일 아침, 시내는 한산했다. 



시험 일시가 평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었지만 장소는 지난번과 같았다. 문이 잠겨있는 건물 안에서 직원 한 명이 사람들이 도착할 때마다 문을 수동으로 열어주고 있었다. 한 번 와봤던 곳이어서 그런지, 건물을 들어서는 기분이 예전만큼 많이 긴장되진 않았다. 한산했던 도로만큼 시험장에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북적북적했던 지난 시험과는 사뭇 달랐다. 시험 등록을 위해 줄을 섰는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려왔다. 순간 귀가 확 트여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정말 한국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혹시? 했지만.. 그 사람들은 KAPS 시험을 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날 그곳에서 인턴 약사들의 Written 시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대부분이 그 인턴 약사 시험을 치러 온 사람들인 듯했다. 인턴 시험은 오픈북 시험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짐이 많았다. 어떤 여자는 큰 가방에 책을 어찌나 많이 넣었는지, 들고 서 있지도 못해서 바닥에 내려놓고 줄이 줄어들 때마다 두 손으로 힘들게 옮겨 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모습도 어찌나 부럽던지.. 빨리 이 시험을 넘어, 인턴을 시작하고 인턴 시험을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줄이 금세 줄어들어 내 차례가 되었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하면서 담당 직원에게 오늘 온 사람들 중 KAPS 시험을 치는 사람은 몇 명 정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14-15명 정도 된다고 했다. 역시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두 배 정도 많은 숫자였다. 







컴퓨터가 한 대씩 놓여 있고 칸막이가 대충 쳐져있는 방에서 Paper 1 시험이 시작되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시험 규칙과 시험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섹션을 넘기자, 화면 오른쪽 위에서 두 시간이 카운트되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더 해서 그런지, 아니면 컴퓨터 베이스로 바뀌면서 실제로 시험이 쉬워진 건지 몰라도 문제들이 대체로 심플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지난 시험에는, a. b. c. 세 가지 중 맞는 내용을 고르라는 문제의 보기가 1) a,   2) b,   3) c,   4) a and c,   5) all of the above와 같은 형식이 많았다면, 이번엔 그냥 바로 한 가지만 고르면 되는 문제가 많았다. 지난 시험과 중복되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중간중간 생뚱맞은 문제도 있어서 어이없어하며 찍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수생’ 답게 나름 무난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남자 한 명이 손을 들고 시험관에게 이야기를 하더니 바로 짐을 싸서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 시간짜리 시험을 한 시간 만에 다 풀고 나가다니.. 대단하다. 대체 얼마큼 준비를 잘 해온 것일까.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꽉꽉 다 채우는 듯했고, 나도 마지막까지 리뷰를 하고 Paper1 시험을 끝냈다.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그 남자는 이미 점심을 먹고 다시 건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포함한 몇 명의 다른 응시자들과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한국(나), 네팔, 방글라데시, 이란, 유럽… 어느 한 명 겹치는 국적이 없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는 나처럼 이번이 첫 시험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시험을 쳤다는 방글라데시 약사 아저씨는 지난번 시험에서 나를 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호주에 오기 전에 방글라데시의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고 했다. 우리들 중 Paper2를 안 치고 집에 가는 사람은 나 혼자였지만, 나와 반대로 이전 시험에서 Paper 1을 통과해서 오후 시험만 치러온 한 명이 맨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모두의 관심은 한 시간 만에 시험을 다 치고 나갔던 네팔 약사에게로 향했다. 잘 쳤냐고, 문제가 그렇게 쉬웠느냐고 묻자, 이번이 첫 시험이라는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는 문제는 아니까 바로 답을 찾을 수 있었고, 모르는 문제는 계속 봐도 모를 테니 바로 찍었다"며..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시험이었다."는 그런 심플한 그의 대답. 전체가 객관식 문제인 시험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르는 문제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언젠가 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고, 그냥 한 시간이나 빨리 시험장을 나가는 것이 그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토픽은 다들 어떻게 공부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주변에 이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혼자 레퍼런스와 온라인 자료를 뒤져가며 공부했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점이었다. 누구 하나 쉽게 준비한 사람이 없었다. 시험도 시험이지만, 모두들 통과 이후의 과정도 걱정하고 있었다. 영어로 말하는데 아무런 어려움 없어 보였던 그 네팔 약사는 호주 약국에서 그냥 일반 직원으로라도 일해보고 싶어 지원했지만, 호주 학력과 경력 없는 이력서에 답을 주는 약국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했고, 그 말에 방글라데시 약사 아저씨도 동의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동질감에서 오는 묘한 위안과, 첫 시험을 치고 나왔을 때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더라면 같이 공부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함께 들었다. 혹시 모르니 8주 뒤에 시험 결과를 받아보고 시험을 다시 쳐야 할 사람들끼리는 그룹 스터디를 하자며,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서로 연락할 일은 없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