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약사 예비시험 치던 날
#1.
2014년 9월 4일 목요일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브리즈번 시내 중심에 있는 한 높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평일 아침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차가 약간 밀렸지만, 여유 있게 출발한 덕에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앞 Loading zone에 정차하여 B와 인사를 하고, 혼자 건물로 들어섰다. IELTS 시험장은 이제 익숙해져서 편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는데,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시험을 치게 되니 또다시 그 낯선 긴장감이 밀려왔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대여섯 명의 사람들.. 모두 왠지 같은 시험을 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24층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미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했던 대로 모두 다 같은 층에서 내렸다. 그곳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벽에 붙은 명단을 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사 시험만이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여러 보건의료계 시험들이 같은 장소에서 치러지는 것이었다. Dentist가 70명으로 가장 많았고, Physiologist 6명, Medical scientist 3명, Dietitian 1명, Veterinarian 1명이었다. Pharmacist 시험을 치러 온 사람은 7명이었다.
모두들 시험 45분 전인 8시 15분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안내문에 맞춰서 시험장에 온 것 같았지만, 사실 그렇게 일찍 도착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별다른 등록 절차 없이 그냥 로비에서 각자 대기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도 사람이 젤 많은 듯했고,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한국 사람은 나 혼자인 게 분명했다.
시험 15분 전, 수험 번호에 따라 나뉜 방으로 들어가라는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방에는 치과의사부터 수의사까지 모든 응시자가 다 함께 앉아있었다. 칠판에는 각 직업별 시험 시간이 적혀있었는데, 오전에 3시간만 치고 끝나는 시험도 있었고, 1시간 반 혹은 2시간씩 나누어 오전 오후 모두 치는 시험도 있었다. 시험관은 계산기를 써도 되는 시험을 알려주었고, 동일한 답안지를 나누어준 뒤 시험 정보와 개인 정보를 적으라고 했다. 시험 조건이 다른 여러 분야의 응시자들을 한 방에서 시험 치게 하다니 뭔가 신기했다.
#2.
호주약사 예비시험(KAPS exam)은 Paper1과 Paper2로 나뉘어있고, 각 Paper당 100문제를 2시간 동안 푸는 시험이었다. 총 4시간의 시험이지만, 중간에 점심시간이 3시간이나 되어서 하루 종일 시험을 치는 기분이 들었다. 각 Paper는 다시 두 영역으로 나뉘게 되고, 그 두 영역에서 모두 50% 이상 맞추면 해당 Paper 합격, 그리고 두 Paper를 모두 합격하면 전체 합격이 되는 것이다. 만약 한 Paper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불합격일 경우 향후 2년 동안은 불합격한 Paper만 다시 응시할 수 있다.
지금은 컴퓨터 시험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종이 시험이어서.. A4용지 단면 인쇄된 꽤 묵직한 책 같은 시험지를 놓고 시험을 쳤다. 시험 후에 버려질 많은 이면지들이 좀 아깝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문제를 풀면서 정답일 거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표시를 해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 예상해보기로 했다. 같은 Paper 안의 100문제에 대해서는 세부 영역이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파트별 정답 비율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일단 전체 50% 이상은 맞춰야 기대라도 해볼 수 있을 테니 체크는 해보기로 했다.
초반에는 ‘어? 이건 답이 뭐였더라?’, ‘음... 이런 것도 물어보는구나.’하면서 한 장씩 넘겼는데, 그렇게 넘기는 장수가 계속 쌓여가자 당혹스러웠다. 자신 있게 정답이라고 체크할 수 있는 문제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가 공부한 것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시험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문제와 보기의 영어 단어들의 뜻을 모른 채.. 그냥 찍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 Part1 100문제 중에 정답일 거라고 표시한 문제는 35개밖에 되질 않았다. 이럴 수가.
그렇게 거짓말처럼 오전 시험 시간이 끝나버렸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B를 만나 점심을 먹으며, 이 한심한 사태를 전했다. 하하하. 웃고 있지만 농담이 아니라고.
#3.
긴 점심시간 후 B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다시 혼자 돌아온 시험장에는 오후 시험 없이 끝낸 사람들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나도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능 시험 언어영역 시간이 끝난 뒤의 기분이 이랬었지.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갈 수는 없다... 내 마음이 어떻든 시험은 재개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Paper1 보다 더 어려워한다는 Paper2 문제들이 오전처럼 똑같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Paper1보다는 계산문제가 더 많아서 결과가 조금 나을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끝까지 다 푼 다음 세어보니 또 35개였다…. 나 원 참.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하루 종일 쌓였던 긴장감이 모두 사라지고 깊은 허무감이 밀려왔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찍어본 시험이 또 있었던가. 게다가 그 시험이 살면서 친 가장 비싼 시험이라니. 나 자신이 그냥 어이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B를 보니 미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아무래도 두 파트 다 35개밖에 못 맞춘 거 같다고 징징 거렸더니, 그는 괜찮다며, 잘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머지 65개 중에서 찍었어도 15개 이상은 맞추지 않았겠냐며 결과는 모른다는(?) 위로를 해주었다. 나도 스스로를 다독여보았다.
그래, 괜찮다. 또 처음이니까.
어쨌든 극한의 스트레스 기간은 끝이 났다. 아니 잠시 멈춘 것일 테지. 그 날 저녁, 시험 친 기념으로 아주 간단하게 와인을 마셨으나.. 그간의 스트레스로 나 혼자만 만취했다고 한다. 덕분에 다음날은 하루 종일 누운 채로 회복기를 가져야 했다. 그리고 나니 주말이라, 같이 사는 셰어 메이트들과 또 파티를 했고 - 위로 축하 환송 환영까지 모두 섞였던 그런 시간 – 일요일엔 또 한 번의 회복기를 가지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시험 결과 나오는 데까지는 두 달이 걸린다고 했지만, 딱 한 달만 휴식하기로 맘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