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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Oct 27. 2020

12. 맨땅에 헤딩이란 이런 것

한국 약사들을 위한 호주 약사 시험 이야기



호주에서의 두 번째 여름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호주에서는 연말연시 공공기관에서 모든 업무를 멈추는데, 그 기간이 끝날 즈음에 호주 약학 협회에 접수했던 내 서류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가 서류를 요청해온 것이다. 




From: Assessments@pharmacycouncil.org.au

Sent: Friday, January 10, 2014 11:51 AM

To:****@******.com

Subject: Australian Pharmacy Council - Further documents required - J****** ****


Dear Ms ***** 

I refer to your recent Application for Assessment of Professional Qualifications in Pharmacy. To enable the assessment of your qualifications to continue, we require the following documents to be provided. 

Please note that the APC does not accept scanned, emailed or faxed supporting documents. Please provide complete, clear and certified photocopies of all documents requested......




서류 심사를 접수하고 기다린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3월 시험 접수에 실패해서 6개월 공백이 생긴 사실을 돌이킬 수는 없었고, 호주라는 나라가 얼마나 천천히 흘러가는 곳인지를 몸소 느끼고 나니 조급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화를 낸들 무엇하리, 원망을 한들 무엇하리.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페이스북 피드에서 발견한 혜민스님의 짧은 글이 나를 다독여주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힘든 일들, 현재는 믿기 어렵겠지만
이삼 년 후에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지금 이 경험이 나를 지금 성숙시키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내세요.




추가 자료들을 모두 제출하고도 또 두 달이 지난 3월 중순이 되어, 심사를 통과했다는 레터를 받을 수 있었다. 최소 6주가 걸린다던 서류심사는, 신청서를 발송한 지 장장 15주 만에 끝이 났다. 이렇게 네 달 가까이 걸린 서류심사 통과로,  드디어 호주에서 약사 '예비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이 시험을 패스한 것도 아니고, 칠 수 있게 되기까지... 영어시험부터 시작해서 참 오래도 걸렸다. 



9월 시험 신청 마감일은 한참 남았지만 신청서류를 일찌감치 발송하고 시험비도 바로 입금했다. $1400이었다. 아이엘츠 시험비가 비싸다고 그렇게 투덜댔었는데, 이번엔 한 번에 $1400짜리 시험이었다. 그나마도 호주에서 시험을 칠 경우 $1400로, 해외에서 칠 때 $1620 인 것 보다 약간 싼 것이었다. 


(2020년 현재는 시험 응시 조건, 일정, 방식 등이 부분적으로 바뀌었고, 시험비는 $2110로 호주 내에서 칠 때와 해외에서 칠 때 동일하며, 2013년에 $700이었던 서류심사 비용은 $1260이다. 매년 오르는 비자 신청비를 봐도 그렇지만, 이 나라.. 이런 비용은 정말 눈치도 안 보고 팍팍 올리는 것 같다. 비싸도 올 사람은 오니까.)







호주의 약사 시험




한국은 매년 1월에 약사 국가 고시가 있는데, 이 시험에서 합격하면 약사 자격증이 나온다. 


1년에 한 번 있는 이 시험을 "약사 시험", "약사 고시", 또는 줄여서 "약시"라고 부른다. 약대 졸업자 혹은 2월 졸업예정자들이 이 시험을 칠 수 있는데, 복지부에서 인정하는 외국 약대를 나온 사람도 한국 약대생과 함께 이 약사 고시를 칠 수 있었고 통과하면 한국 약사로 바로 등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20년부터는 외국 약대 졸업생은 약사 고시를 치기 전에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하도록 바뀌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 약대 졸업생이 자국 약대 졸업생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호주에서는 약대를 졸업할 때 이런 약사 고시라는 것을 치지 않는다


약대를 졸업하면 인턴 약사로 등록(Provisional registration)하여 최소 1824시간 동안 약사의 관리하에 근무해야 한다. 이 기간 안에, 여러 과제와 온라인 시험이 포함된 '인턴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수료해야 하고, 필기시험(Written Exam)구술시험(Oral Exam)으로 구성된 두 가지 '인턴 약사 시험'을 차례로 통과해야 비로소 정식 약사로 등록(General registration) 할 수 있다



호주에는 한국과 같은 '약사고시'가 없다고 말한 부분은, 약사 고시가 없기 때문에 더 쉽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스템이라는 이야기이다. 필기시험의 난이도로만 비교한다면 한국의 약사 고시가 더 어렵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호주에서는 인턴 과정 전체가 과제와 여러 크고 작은 시험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약사 등록과정이 더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졸업하고 나서도 1년 정도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시험들을 통과해야 정식 약사로 등록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약사 등록(registration)이라는 것도 한국의 자격증 개념과는 달라서, 한 번 하면 끝이 아니라 계속 일하고 공부해서 조건을 채우고 매년 갱신해줘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약대 졸업생들은 어떻게 호주 약사로 등록할 수 있을까? 


호주에는 해외에서 약대를 졸업한 사람들을 위한 두 가지 약사 예비시험이 있다. 


첫 번째로, 호주와 비슷한 수준과 내용의 교육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국가들(영국/미국/캐나다/아일랜드)에서 현재 약사로 등록되어있는 사람은 CAOP (Competency Assessment of Overseas Pharmacists examination)라고 하는 '해외 약사 숙련도 평가 시험'을 볼 수 있다. 이 시험은 응시자가 본인의 약학 지식과 숙련도를 호주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이론보다는 실무적인 내용 위주로 구성되어있고, 인턴 약사 Written Exam과 시험영역이 거의 비슷하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152시간의 짧은 인턴 근무와 구술시험 통과만으로 호주 정식 약사로 등록할 수 있다.

 ***참고로 호주의 자매 국가인 뉴질랜드 약사들은 이 시험도 칠 필요 없다. 

 

두 번째로, 호주/뉴질랜드/영국/미국/캐나다/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약대를 졸업한 사람들은 KAPS (Knowledge Assessment of Pharmaceutical Sciences examination)라는 '약학 지식 평가 시험'을 쳐야 하는데, 한국 약대를 졸업했다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시험은 응시자가 호주 약사 업무와 관련된 약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호주 약대 학생들이 배우는 것과 동등한 수준의 내용을 배우고 왔는지 평가하는 시험이라고 볼 수 있고, CAOP와 달리 좀 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그때부터는 호주 약대 졸업생의 인턴과정과 동일하게 1824시간 인턴 근무, 인턴 트레이닝 프로그램, 필기시험, 구술시험을 거친 후 정식 약사로 등록할 수 있다. 이전 글에서 편의상 해외 약사를 위한 호주 약사 예비시험이나 기초 약학 시험 등으로 표현했던 시험이 바로 이 KAPS시험이었다. 



한국 약사가 속하는 이 두 번째 그룹의 입장에서 전체 호주 약사 등록과정을 설명한다면, 


예비시험 또는 1차 시험이 KAPS 시험이고, 

인턴 약사 등록 후 치게 되는 Written exam 2차 약사 시험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게 되는 Oral exam 3차 약사 시험으로 볼 수 있겠다. 









시험 접수를 했으니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붕 떠있던 마음을 잡고 공부 방향을 찾느라 어영부영하다 보니 길게만 느껴졌던 6개월의 공백은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고, 시험 날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KAPS라는 시험 준비를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나는... 그냥 했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험 문제가 전부 객관식이고, 50% 이상만 맞추면 합격이라고 하니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던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첫 단계는 시험 안내 자료에 나와있는 시험과목에 대한 설명과 연습문제를 훑어보는 것이다. 대부분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것 같은 내용이긴 하다. 근데 그게 한 10년 전쯤이라는 것이 함정. 추천 도서 목록이 있길래 근처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다. 대학교 수업 교재나 참고문헌이 될법한 살벌하게 두꺼운 영어 원서들이었다.  모든 것을 다시 영어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온라인을 뒤져봤지만 최근 시험 후기도 없고, 제대로 된 기출문제나 연습문제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공부해야 할 범위는 또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그냥 이것저것 다 뒤져가며 되는대로 공부를 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처음도 끝도 없는.. 진도가 없는 그런 공부였다. 한국 약시를 공부할 때에는 12과목을 순서대로 세 바퀴를 돌리는 걸 목표로 하여 동기들과 진도 맞춰가며 열심히 달렸었는데... 그때가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요즘은 온라인에 KAPS 시험 대비 문제집이라는 것도 팔고 있고, 문제 은행 사이트도 생긴 것 같은데, 거기에 나와있는 내용이 얼마나 시험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공부할 땐 그런 것도 없어서 미국 약사 시험용 책으로 공부하고 그랬으니, 아무것도 없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험 일주일 전 풍경



7월 중순, 이메일로 시험일정이 날아왔다. – Professional Examinations September 2014 ; 브리즈번 시티 중심의 한 건물에서 9월 4일 목요일 아침 9시부터 4시까지 - 생각했던 것보다 시험 날짜가 빨랐다. 9월이라고 할 땐 왠지 중순이나 말 일 것만 같았는데 4일이라니, 갑자기 한 달을 뺏긴 것 같은 좀 억울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한 달 반 정도는, 진짜 시험공부처럼 열공했던 것 같다. 그래 봐도 뭔가 허공에 삽질하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나 떨어져도 되지?" 



시험이 가까워오자 나는 버릇처럼 B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B는 다 괜찮다고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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