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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Nov 01. 2020

14. 두 가지 결과가 나에게 말해준 것

약사 시험 결과 이야기


2014년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 데이라고 온 동네가 들떠있던 그 날이었다. 그 분위기를 함께 즐기기 위해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한국에 살았다면 특별한 날마다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을 하고 싶어 했겠지만, 호주에서 산지 2년.. 장을 봐서 집에서 차려먹는 것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그것이 더 좋아졌다. 마트 직원들은 저마다 나름의 분장을 하고 있었고, 그중엔 좀 나이 든 겨울왕국 엘사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려는데 법무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홈페이지에서 시험 결과를 확인하라는 이메일이 왔다고 했다. 시험을 치고 딱 8주가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접속한 호주 약사시험 홈페이지의 화면 한가운데에, 시험 결과가 너무도 작고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준비가 부족했고, 제대로 문제를 풀지도 못했고.. 그래서 결국 FAIL이었던 것이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막상 결과를 보니 담담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사탕을 받으러 다니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던 그날 밤.. 우리 집은 나 때문에 분위기가 숙연했다. 시험을 마치고 왔던 8주 전 그 날 저녁 처럼.. 나는 또 속상한 마음으로 와인에 취했다.

 

 

다음 시험까지는 4개월 정도가 남아있었다. 시험 접수기한을 어이없게 놓쳐 6개월의 공백이 생겼을 때, 그때 많은 시간이 있었는데 왜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을까.. 소용없는 후회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래도 공부를 안 했던 건 아닌데.. 나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남은 시간 열심히 하면 정말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다음에 또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 자신에 대한 의심도 계속 들었다. 언제 끝이 날까, 끝이나긴 할까.. 못난 생각들이 떠나질 않았다. 또 한 번의 시험으로 $1400을 더 지출해야 한다는 것도 작지 않은 부담이었다. B가 학교와 실습으로 바쁜 와중에도 아침저녁으로 투잡을 뛰고 있었지만, 매주 빠져나가는 생활비로 통장에 계속 “0”이 찍히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던 때였다.











며칠이 지났다. 속상한 결과를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을 때, 법무사님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시험 결과의 hard copy가 사무실로 왔으니 찾아가고, 다음 시험 접수 서류에 사인도 하고 가라 했다.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Paper 2는 패스 하셨네요.



……?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고, 나는 진짜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홈페이지에선 overall result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두 페이퍼 모두 FAIL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페이퍼는 PASS라니, 이게 무슨 서프라이즈 선물인가. 그 결과를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얼른 법무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친절하게도 불합격 시험 결과와 함께 동봉되어 온 다음 시험의 접수 서류에다 사인을 하고, 결과 레터를 받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급히 오느라 점심도 못 먹은 B와 나는 근처 헝그리잭으로 가서 햄버거를 먹으며 찬찬히 결과 레터를 읽어보았다. 



"The result of the September 2014 session of the KAPS have now been analysed and I am pleased to advise that you have passed Paper 2." 

2014년 9월 KAPS 시험의 결과가 나왔으며, 당신이 Paper 2를 패스했음을 기쁜 마음으로 전합니다.


"However  you were unsuccessful in Paper 1 and a profile of your results is enclosed  for your information." 

그러나, 당신은 Paper 1에서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그 상세 결과를 함께 동봉합니다. 





FAIL인 결과지를 손에 들고도, 나는 내내 웃고 있었다. 패스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Paper 2를 통과했다는 것에 오롯이 기뻐할 수 있었다. 상세 시험 결과지라고 했지만 별 정보가 없었다. 각 영역당 50% 이상 맞추면 Pass라고 했는데, 내가 영역별로 몇 점을 받은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고, 전체 응시자의 점수 분포만 알려주었다어쨌거나, 내 예상대로라면 두 페이퍼에서 맞은 문제의 개수는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한두 문제 차이로 PASS와 FAIL이 나눠졌을 것 같은데, Paper1의 두 파트 중 하나인 약물 화학에서 과락이 났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턱걸이를 해서 패스를 했을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다음엔 Paper1만 치면 된다는 사실은 나의 부담을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줄여 주었다. 공부해야 할 범위는 Paper1과 2에서 겹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아주 많이 줄지는 않았고, 시험비는 Paper에 상관없이 Attempt당 이기 때문에 전혀 차이가 없지만.. 그런 것 보다도 이번에 패스한 것처럼 다음번에 나머지도 패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 아주 컸다. 정말 정말.. 정말 다행이었고.. 진심으로 기뻤다.

 

 

시험 결과를 전했을 때 사람들은 힘내라며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래도 절반 통과했으니 괜찮다고, 그것도 기쁘다고 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런 기분이었는데,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overall result에 대한 위로를 먼저 했다. 딱 한 친구만이 소식을 듣자마자 Congratulations!라고 했다. 그녀는 나의 절반의 성공부터 축하해주었다.




만약 내가 홈페이지에서 처음부터 시험 결과를 자세히 알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Paper2의 PASS라는 단어를 볼 틈도 없이, 전체 결과의 FAIL에 먼저 멈춰서 좌절했을 것이다. 다시 PASS로 눈길을 돌려봐도, 그 순간의 좌절이 커서 절반의 성공에 이만큼 기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어쩌면 늘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실패한 것에 슬퍼하고, 가지지 못했던 것에 아쉬워하면서, 거기에 가려져서 내가 얻은 작은 성공들,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에는 기뻐하고 고마워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이다. 첫 시험 결과를 받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자란 것 같다.






2014년 브리즈번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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