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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Nov 01. 2020

16. 꿈을 파괴하지 않는 방법

두 번째 약사 시험 결과 이야기

#1.



시험을 잘 쳤는지 못 쳤는지는 잊은 채 건어물녀가 되어 밀린 드라마들을 며칠 몰아보다 보니, 호주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Easter 연휴가 왔다. 연휴 전에 내 생일도 있었다. 신나게 놀고, 쇼핑하고, 외식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호주에서 만나 친해진 동생 Y와 둘이서 케언즈로 3박 4일 여행도 다녀왔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펑크를 냈다며 Y가 나에게 같이 가잔 말을 꺼냈을 때, 그 여행 날짜가 시험이 끝난 얼마 뒤라서 아주 시의적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망설였었다. 학교를 다니는 중에도 열일하며 백수인 내 몫까지 돈을 벌고 있는 B를 두고 나 혼자 여행이라니.. 거기다 케언즈라니. 나는 몇 년 전에 한국에서 호주 여행을 왔을 때 짧게 여행한 적이 있는데, 나보다 호주에 오래 산 B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질 않아서 다음번엔 꼭 같이 가자고 했던 곳이었다. 



금전적인 부담과 미안함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B는 흔쾌히 다녀오라 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으니 쉬고 오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덕분에 3박 4일 휴양 여행이 확정되었다.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확인했는 3박 4일 내내 케언즈에 90% 비가 올 거라고 되어있었다. 몸도 마음을 따라가는지, 여행이 다가올수록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근심을 가득 안고 떠난 여행이었다. 



비행기와 숙소 이외엔 아무것도 예약하지 않고 갔던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한국 여행사를 찾아갔다. 처음엔 왠지 호주를 여행할 때 한국 여행사보단 로컬 여행사를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의 여행 후 한국 여행사에서 같은 상품을 더 싸게 살 수 있고 조언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을 알게 되었다. 여행사 사장님 말에 따르면, 케언즈에 사는 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브리즈번과는 달리 열대기후라서 강수량이 0인 날이 거의 없이 거의 매일 1-5mm 정도로 뜨기 때문에 늘 확률이 있을 뿐이지 비가 많이 오진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라하셨다.



2015, Cairns QLD Australia



다행히 4일 중 2일은 맑았다. 배 타고 나가서 스노클링도 하고, 섬에 들어가서 카약도 타고, 맛집 찾아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지친 나를 힐링해주기에 더없이 좋은 여행이었다. 활동적인 Y가 나에게 맞춰주어서 데이 투어를 세 개가 아닌 두 개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바쁘지도 힘들지도 않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짧았지만 길게 느껴졌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날, B는 그랬다. 여행을 보내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그동안 시험공부한다고 고생 많이 했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으면 정말 미안했을 거라고. 한결같이 감동스러운 사람 같으니.








#2.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험이 없어진 일상에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당분간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움직였다. 영어 모임에도 나가고, 친구들도 만나며 바쁘게 지냈다. 이 휴식기간이 끝나기 전에 여행을 한 번 더 떠나기로 했다. 이번엔 B와 함께. 시험 결과가 나오기 일주일 전쯤에 떠나기로 했다.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호주를 맘껏 느끼며 즐기고, 돌아와서 결과를 확인한 뒤에 거기에 맞춰서 또 힘차게 달려보자는 계획이었다.

 

 

B의 2주 휴가에 맞추어 그의 동생도 일주일 휴가를 낼 수 있게 되어 여행은 로드트립으로 정해졌다. 북쪽으로 올라갈까 남쪽으로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5월은 좀 쌀쌀해지는 시기이니 따뜻한 북쪽 퀸즐랜드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올라가는 김에 케언즈까지 찍고 오고 싶었다. B에게 내가 좋아하는 케언즈의 Lagoon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1700km는 꽉 채운 5박 6일 여행의 일정으로 다녀오기엔 조금 무리인 거리였다. 열흘만 되었어도 넉넉했을 텐데.. 아쉽지만 이번엔 타운즈빌까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로 했다. 



숙소도 잡지 않고 그냥 떠나는 헐렁한 여행이긴 했지만 시간이 넉넉하진 않은 탓에 이동 경로, 시간, 볼거리를 고려해서 숙박할 지역을 정하는 정도의 계획은 세워보았다. 시험이 끝난 지 어느덧 7주가 지나던, 여행을 코앞에 둔 금요일 저녁,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시험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벌써?... 결과는 8주 뒤에 나온다고 했는데...? 



호주에서 뭔가가 늦어지면 늦어졌지 빨라질 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일주일 빠른 이메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읽자마자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기 시작했다. 시험 결과를 모른 채 맘 편히 여행을 즐기고 싶었던 계획은 무너져버렸다. 수험번호를 찾겠다고 책장의 서류를 모두 뒤져보는데.. 손도 떨리고, 잘 보이지도 않아서 한참을 뒤적거리다 겨우 찾아냈다. 



웹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어이없게도 자동 로그인이 저장되어있었다. 하… 맞다. 두 번째 시험이라 6개월 전에 확인한 적이 있었다. 눈앞에 있는 로그인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또 Fail 이면 어떡하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면 그 말이 씨가 될까 봐.. 입은 꾹 다문채 B만 쳐다보고 있었다. B는 웃으면서 그냥 빨리 누르라고 했다. 긴장 안 되는 척했지만 그도 분명히 긴장했을 것이다. 



긴 숨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었다. 


click- 소리와 정적. 


컴퓨터 스크린에 머물던 시선을 돌려 B와 눈을 마주치고 몇 초.. 



그리고 둘은 방 안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IELTS 시험을 결국 넘었고, 어이없는 이유로 6개월간 발이 묶였었고, 힘들었던 처음 한 번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 그리고 이제 그 나머지 절반을 넘어 나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룬 것이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능하다는 확신도 없어서 마음 한쪽에 항상 의문을 안고 걸어왔던 길이었다. 안 될 것 같았지만, 될 거라고 말하면서 버텨왔던 시간이었다. PASS라는 한 단어로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모두 다 보상받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많이 수고했다. 물론 앞으로 해나가야 할 많은 일들이 더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걸로 됐다.









#3.

 


Life is never about the goals themselves. Life is about the journey.

 

 


계획과는 달리 시험 결과를 알고 떠나게 된 5박 6일 로드트립은.. 순간순간이 선물처럼 감동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물론, 두 운전사님들은 좀 많이 피곤해서 다시는 로드트립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지만. 그랬던 생각도 1년이 지나고 나니 다 잊게 되고, 모두에게 좋았던 기억으로만 남아서.. 언젠가 다시 또 떠나자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땐 좀 더 여유롭게 여행하고 싶다. 그 여행이 너무 먼 일이 아녔으면 좋겠다.



여행을 다녀온 뒤 우연히 보게 된 한 TED 강연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꿈 자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목표를 이루었을 때 그곳에 엄청난 행복이 있는 기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목표 자체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지 말아요. 


높은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은 순간적인 것이고, 그리고 나선 곧 그 길을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단지 산 위에 오르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올라간다면 내려오는 길이 허무할 수밖에 없으니, 인생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그 여정의 모든 단계들을 즐기며 살아가세요. 


한 단계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기뻐하고 축하받고, 

다른 단계에서 실패했다면 거기서 무언가를 또 배우고.. 

그렇게 계속 크고 작은 꿈들을 하나씩 이루면서 여행하듯이 살아가세요. 




나는 여태껏 그리 살지 못했던 것 같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었을 때의 기쁨은 정말 잠깐이었고, 한 고개를 넘었더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산을 넘으니 또 다른 산이 있었고..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빨리 이 많은 산들을 다 넘고 좀 쉬고 싶었다. 



이제부턴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한 곳에 도달하면 아주 행복한 기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그냥 산들을 하나하나 넘어가는 길에서 보는 풍경들을, 만나는 사람들을, 느끼는 감정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렇게 즐기면서 사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그렇게 크고 작은 꿈들을 이루어 가면서 진짜 여행하듯이 살아보려고 한다. :)




2015, 호주 퀸즐랜드주 로드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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