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신청과 약사 등록 이야기
호주 약사 예비시험에 합격한 결과로 두 가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첫 번째는 한국의 학력과 경력을 인정받아 호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 두 번째는 호주에서 ‘인턴 약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 두 가지 과정은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단지 호주에서 살고 싶을 뿐 약사로 일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 시험 결과 레터로 비자만 신청하면 되고 인턴 약사로 등록할 필요가 없다. 그게 아니라 호주 약사로 등록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영주권이 아니더라도 호주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어떠한 종류의 비자라도 받아서 인턴 과정을 잘 마치기만 하면 된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두 가지 기회를 모두 잡고 싶었다. 그래서 목표를 두 단계로 나누어서 진행했다. 1차 목표를 호주에서 약대를 다시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약사 예비시험을 통과하여 호주에서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받는 것으로,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턴 약사를 거쳐 호주에서 정식 약사로 등록하는 것을 2차 목표로 잡은 것이다.
#1. 비자 신청 조건
호주에 온 지 2년 반 만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처음 호주로 왔을 땐 KAPS 시험까지 통과하면 바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호주 약사 이민의 문이 점점 닫혀서 남은 선택권이 많이 줄었다. 몇몇 주에 '약사' 직종에 대한 주정부 후원 비자가 열려있었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각 주에서 요구하는 모든 세부사항에 부합되는 지원자들 중 일부만이 주정부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통과했을 당시 상황에서 내 조건으로 주정부 후원을 받고 영주권(190 visa)을 신청할 수 있는 주는 8곳 중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결국 추후에 조건을 채워서 영주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임시비자(489 visa)를 알아보게 되었고, 내가 쭉 살고 있던 퀸즐랜드주가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법무사님이 조건을 확인해보니 애매한 부분이 있어 주정부에 이메일로 문의를 했는데,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왠지 안심할 수가 없어서 신청을 넣기 전에 다른 이민 변호사와도 상담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이제 다시는 실수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모든 주정부 후원 비자, 신청 불가능합니다.
두 명의 변호사가 B와 나의 앞에 앉아서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쳐 보였다. 호주 모든 주의 주정부 후원 비자들을 위한 컨디션을 정리한 자료였다. 무료 상담을 받는 거였는데도 정말 성의 있게 준비 해오셨다. 대표 변호사인 남자 변호사님이 왜 내가 이 비자들을 신청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주별로 하나하나 지목하며 상세히 알려주었다. 거의 모든 주에서 그 주에서 졸업한 학생들, 혹은 그 주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거나, 1년 이상 고용 계약을 맺은 사람들에게만 비자를 후원해준다고 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했던 퀸즐랜드주의 임시 비자도 퀸즐랜드주의 시골 지역에서의 12개월 이상의 고용계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어서,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는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변호사님은 내가 현재 주정부 후원 비자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대안으로 신청할 수 있는 다른 비자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 나는 그 설명을 잠시 멈추고, 출력해간 한 장의 종이를 내밀어보았다. 퀸즐랜드 주정부의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여러 내용들 중 주정부 후원 임시비자(489 visa) 신청 조건에 대한 설명 중 한 부분이었다.
다음 중 하나를 만족할 것:
- 퀸즐랜드 시골지역에서 비자를 신청하려는 직업으로 12개월 고용계약을 받을 것; 혹은
- 학위 이후에 2년 이상의 풀타임 경력이 있을 것 (퀸즐랜드주나 호주 내의 경력이 아니어도 됨)
주목: 만약 현재 호주의 다른 주에서 살고 있거나 일하고 있거나 공부하고 있다면, 퀸즐랜드주의 고용 증명 자료를 제출해야 함
이 내용대로라면, 다른 주가 아닌 퀸즐랜드주에서만 2년 반 살고 있고, 한국 약사 경력이 5년 있는 나는 12개월 고용계약 없이도 퀸즐랜드 주정부 후원이 가능하지 않냐는 질문에 두 변호사님은 조금 당황했다. 그들이 출력해온 자료도 주정부에서 제공한 자료인데 고용계약 없이는 안 될 것처럼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 변호님이 두 자료가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 자리에서 바로 주정부 사무실에 전화해서 물어보겠다고 했고,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오피서의 대답은, 다행히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통화가 끝나자 변호사는 테이블 위의 자료를 정리하며 “들으셨죠? 된다고 하네요! 잘 됐네요.” 했고, 우리는 그제야 안심했다. 다른 비자에 대해 준비된 더 많은 자료들은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
몇 년 동안 이민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냥 법무사나 변호사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직접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더 멀리 돌아갈 수도 있다. 나도 처음부터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움직였다면 더 빠른 길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미 좀 돌아가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비자 관련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두드려보면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2. 비자 신청
2015년 6월 중순, 드디어 퀸즐랜드 주정부에 후원 신청을 넣었다. 이민성에 EOI도 업데이트해두었다. EOI (Enxpression Of Interest)는 이민성의 Database안에 내가 기술 이민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등록해두는 것인데, 전체적인 내용을 다 입력하면 이민 점수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이민 점수는 75점으로, 당시 60점 이상이었던 기준에서는 충분한 점수였다. 하지만 주정부 후원 비자의 경우, 이민 점수보다는 자체적인 선별 기준에 따라 후원할 사람을 결정하기 때문에, 점수가 높아도 후원을 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주정부에서 후원해주겠다는 결정을 하면 이민성 쪽으로 정보가 전달되고, EOI 상태가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면서 이민성에서 비자를 신청하라는 Invitation을 받게 된다. 보통 2주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주정부의 결과가 빨리 나왔다. 11일만에 후원 승인이 나온 것이다.
Invitation을 받자마자 비자 신청을 위한 자료와 비자 신청비를 냈다. 뭔가 갑자기 이렇게 빨리빨리 진행되니 기쁘면서도 좀 얼떨떨했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법무사님과 우리의 긴 인연도 이제 끝이 보였다.
고마워도 했고 원망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던 2년이 넘는 시간.
2015년 8월 18일.
489 비자가 최종 승인되면서, 웃으면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우리가 받게 된 489 비자는 호주의 시골지역에서 살고,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4년짜리 임시비자인데, 나중에 2년간 시골지역에 살았다는 자료, 그리고 그중 1년은 풀타임으로 일했다는 자료를 제출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비자다. 바로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489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인 2015년 10월에 업데이트된 퀸즐랜드주 후원 리스트에서 '약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조금만 늦었어도 이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3. 약사 등록
KAPS 시험 통과는 비자 신청을 위한 과정에서 보면 후반 단계이지만, 호주 약사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비자를 진행하는 동시에, 정식 약사가 되기까지의 또 한 번의 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브리즈번 시내에 있는 AHPRA 건물을 찾아갔다. (AHPRA는 Australian Health Practitioner Regulation Agency로 호주의 의사, 간호사, 약사, 치과의사, 물리치료사, 방사선사를 포함한 의료/보건인들은 AHPRA에 등록된다.)
나도 이제 호주 약사 보드(Pharmacy Board of Australia)에 Provisional Registration으로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 약대 졸업생들과 같은 위치가 된 것이다. Provisional Registration으로 등록된 약사를 보통 '인턴' 혹은 '프리 레지'라고 하며, 정식 등록 약사의 감독하에서 약사가 하는 업무를 할 수 있다. 그렇게 1824시간의 인턴 기간을 채우면서 시험과 과제를 모두 통과하면 General Registration을 신청하고 정식 등록 약사 (Registered Pharmacist)가 될 수 있다.
시험 결과가 나오고, 인턴 약사를 위한 등록도 하고, 비자 문제가 해결되는 듯 보이면서, 2015년 6월 한 달은 정말 행복했다. 그 에너지로 다음 목표 지점까지 완전 전력 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금방 또 다른 새로운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호주에서 3년 가까이 살았지만,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일을 해본 적도 없었던 나를 너무도 작아지게 만드는 ‘구직’이라는 큰 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