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약국 취업 성공기
이력서를 보낼 때, 항상 마지막은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서 질문해달라”는 말로 끝낸다. 나는 그게 그냥 형식적인 문장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H약국은 거기에 아주 충실했다.
“인턴 자리에 관심 가져 줘서 고마워.
언제 인턴쉽 시작할 수 있는지, 언제 약국에서 면접 볼 수 있는지 알려줄래?”
“다음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약국에서 볼래? 지금은 내가 휴가 중이니까 수요일에 약국으로 전화 줘.
그리고, 이력서에 비어있던 AHPRA 약사 등록 상태도 업데이트되었으면 알려줄래?”
“수요일 전화 전에 확인할 게 더 있는데, 어떤 레벨의 인턴쉽이 필요한데?
여기 졸업생들처럼 풀타임 프리셉터가 필요하니?
그리고 이력서에 있는 것 말고 경력사항 업데이트된 것 있으면 좀 알려줄래?”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열심히 답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그렇게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좀 친밀감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약속된 수요일이 왔다. 얼마 전 다른 약국과의 전화 인터뷰는, 걸려온 전화를 받았던 거라 별생각 없이 통화가 시작되었고 정신없이 대답하다가 어찌어찌 끝이 났었는데.. 약속한 날에 내가 전화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니 더 긴장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다가 한참 만에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통화는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매니저님은 오늘 약국에 없다'며 내일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수요일에 전화하라고 여러 번 말해놓고 약국에 없다니? 뭔가 김이 확 빠졌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 통화 가능한 시간대만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메일도 남겼는데 답장은 없었다.
직원이 알려준 대로, 다음 날 오전 10시 반쯤에 약국으로 전화를 했다. 이번엔 매니저님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처방전이 밀려있다며 30분 있다가 다시 전화 달라고 했다. 기다렸다가 11시쯤 다시 전화했더니 다른 직원이 받고는 지금 매니저님이 너무 바쁘니 30분 있다가 다시 전화하라 했다. 바쁜 시간에 계속 거는 것 같아서 그냥 매니저님 편한 시간에 연락 달라고 전해달라 부탁하고 끊었다.
긴 기다림 끝에,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매니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자, 인턴쉽 조건, 사는 곳, 운전면허, 이사 여부, 남편 직업(?!), 호주 경력사항 등 이메일로 이미 물어봤던 내용들을 포함한 몇 가지 질문들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른 약국에도 지원했냐고 질문했다. 한 군데 면접 봤고 이번 주말까지 연락받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더니, "그럼 주말까지 기다려보고 월요일에 다시 통화하자"라는 것이다.. (응?)
그렇게 H약국과 이상한, 인터뷰 아닌 인터뷰 같은 통화가 끝이 났다. 약국에 가서 볼 거라고 생각했던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한없이 '을'인 상황이지만, 이틀간 전화하면서 받은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아서, 이곳은 나와는 인연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대면 인터뷰와 전화 인터뷰까지 보았던 B약국에서 연락 주겠다고 한 것이 ‘주말’이었기 때문에,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계속 폰을 손에 쥐고 기다렸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좀 풀이 죽었던 일요일 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두세 곳 정도 온라인 지원 메일을 더 보냈다. 이제는 정말 직접 발로 직접 뛰며 이력서를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담주에 브리즈번과 가까운 선샤인 코스트 지역부터 이력서를 돌리러 가야지 다짐했다.
월요일이 되었다. 추운 아침 기온에 아직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뒹굴거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B약국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매니저님이었다. 기쁜 소식이라며, 약국에서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처음엔 파트타임 약국 보조로 약국일들을 배워가고, 이후에 풀타임으로 인턴 약사로 일하도록 조정해보자고 했다. 세상에!…!!!!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뻤는데.. 현실감이 없었다. 이틀 뒤 이메일을 받고 나서야 조금씩 그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다. 첫 인터뷰로, 망쳤다고 생각했던 그 인터뷰 한 번으로 취업이 되었다. 타이밍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그곳까지 면접을 보러 가서 좋게 봤던 걸까... 다른 지원자가 없었던 걸지도. 아무려면 어떨까.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스무 개의 온라인 지원을 했고, 그중 두 약국에서 답이 왔고, 한 곳에서 인터뷰를 보았고, 그곳에 취업했다. 본격적으로 구직에 몰두한지는 3주 만이었다.
호주 약대를 졸업한 인턴 약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KAPS 출신 외국 약사들과 대화해보니 이것이 얼마나 빠른 것이었던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인턴 자리 구하는 것도, 그리고 인턴 시간을 무사히 마치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턴 시험 준비를 앞두고 나보다 먼저, 혹은 나와 같은 날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을 찾아서 이메일로 연락해본 적이 있다. 같이 공부할 학교 동기 하나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나처럼 막막해서 같이 연습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긍정적인 답은 없었다. 시험 통과하고 거의 1년 만에야 겨우 인턴 자리를 구했다며..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시험 준비는 같이 못하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고, 인턴쉽을 시작은 했었는데 프리셉터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며.. 결국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그만둔 후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서 약국 보조일이라도 구해볼까 생각 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인턴 약사 기간에 필수로 들어야 하는 인턴 프로그램에 포함된 워크숍에서 KAPS 출신 약사들을 몇 명 만났었는데, 유럽에서 온 약사는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약국 보조 일을 구해서 일하다가 시험 통과 후 거기서 인턴으로 계속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란에서 온 약사는 시험 결과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인턴 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구했냐고 했더니, 150 곳이 넘는 약국에 직접 찾아다니며 이력서를 돌린 결과라고 했다.
요즘 호주에서는 약대 입학도 약사 이민도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 약사 근무환경이나 급여가 많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호주에서 약사가 포화상태라서 취업이 쉽지 않다고들 이야기한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같은 외국 약사들이 호주 약대 졸업생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취업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 질문에 대한 지금 나의 답은..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순하다. 그냥 도시를 고집하지 않으면 된다. 경쟁하지 않으면 된다.
나는 비자 때문에 외곽지역으로 이동한 거긴 하지만, 원래부터 시골에 살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호주에 왔기 때문에 시골 지역에만 이력서를 넣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인턴 자리를 도심 지역, 혹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교외 지역에서만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워크숍 참석하러 브리즈번에 갔을 때, 처음으로 많은 인턴 약사들을 한 자리에서 만났었는데.. 나보다 멀리서 온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시골 약국에서는 늘 사람을 구한다. 약사도 인턴도 약국 보조도.. 모두 부족하다. 특히 인턴 약사의 경우는, 약사의 일을 다 할 수 있지만 약사보다 급여가 낮기 때문에.. 약국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인력이고, 그래서 한 번 인턴을 뽑은 약국은, 그 인턴이 시간을 채우는 기간에 맞춰 새로운 인턴을 뽑으려고 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인턴 시간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을 때, 우리 약국장님은 인턴 지원자 몇 명과 면접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아시안이었지만 나처럼 약국으로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국장님이 브리즈번까지 직접 가서 면접을 봤다. 급한 쪽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아참, 그.. 나를 쩔쩔매게 했었던 H약국에서는 내가 B약국에서 인턴을 시작한 한참 뒤에 이메일을 한통 보내왔다. 다음 월요일에 다시 연락 주겠다고 마친 통화 이후로 아무런 연락 없이, 거의 6개월이 지나서였다.
"안녕? 네가 지원했었던 때에 우리가 다른 인턴을 뽑았었는데 그 인턴이 건강상 문제로 그만뒀어.
많이 지났지만, 혹시 아직도 인턴 자리 구하니? 혹시 가능하면 오늘 나한테 전화 부탁해."
한국에서는 몰랐던 호주 취업의 문 -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간단하다. 외곽 지역으로 나가면 경력이 없어도, 외국에서 왔어도 취업할 수 있다는 것. 뭔가 대단한 비밀도, 특별한 사실도 아니 지겠만, 실제로 와서 경험해보지 않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시골에서는 연봉 10만 불 이상에 집과 차를 제공해도 오래 일할 약사를 구하기 쉽지 않고, 도시에는 최저 시급만 줘도 지원자가 넘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약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도시를 선호하는 사람들 중에서 시골 살이를 해보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애초에 가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시골은 도시보다 불편한 점이 많지만, 살아보면 장점도 많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취업의 문은 호주 어딘가에서는 활짝 열려있다.
물론, 호주에서도 도시에서만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야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