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남녀 쌍둥이에 관해 전해지는 말이 있었다.
여자아이가 복을 다 가져가 남자아이가 기를 펴지 못한다. 근거 없는 속설이 된 지 오래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21세기 초에 태어난 남녀 쌍둥이는 어떨까?
박서연. 박서준.
교사인 부모의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서연과 서준. 딸인 서연이 1분 먼저 태어나 나이 든 노인들에게나 의미 있는 명목상 누나.
그런데 서연과 서준 쌍둥이는 서연이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듯 보였다. 뭐든 빨랐다. 목 가누기, 기기, 서기, 걷기, 말문 트이기까지 항상 서연이 한참 먼저였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늘 그러하듯 서준에게 반전이란 없었다.
서연의 성장사는 찬란하다 할 수 있다. 야무지고 단정한 얼굴, 날렵하고 균형 잡힌 신체. 성적은 늘 1등. 달리기, 수영, 태권도, 농구 등 모든 운동 종목 최상위. 만년 반장, 학생회장, 방송부 반장까지 친구들 사이의 평판과 인기도 최고, 리더 십 특출. 입학 졸업식의 단골 대표 선서 학생. 학부모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며 후배들에겐 영원한 워 너 비.
그런데 쌍둥이네는 서연 이전에 이미 검증된 우월한 유전자의 자식이 하나 더 있다. 맏딸 서라. 명문대 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며 지금은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신이 너무 하신 거 아닌가? 이 집안의 여자아이들만 편애하는 신의 부당함에 불만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서준은 이에 대해 한결같이 평화롭다.
박서준. 한영고등학교 2학년.
장신이고 덩치 또한 크다. 어울리지 않게 아기처럼 매끄럽고 뽀얀 피부에 얼굴은 작고 이목구비도 오밀조밀 귀엽다. 천천히 자세히 보면 곱상하다. 공부는 하위권. 왜 공부해야 하는 건지 모른다. 당연히 동기부여가 안 된다. 다른 여자 형제들과 달리 경쟁하기를 무척 싫어한다. 상대가 있는 운동에는 통 관심이 없다. 수줍음이 많아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온순하고 여유롭고 급한 것이 없다. 자기표현에 적극적이고 토론을 즐기며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여자 형제들과 너무 다르다. 서준은 언쟁과 갈등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다.
서준이 가장 난감할 때는 가족들이 자신에게 자꾸만 의견이나 생각을 물어보는 거다.
뭐 먹을래? 뭐 볼래? 어디 갈래?
그게 왜 궁금할까? 주장 같은 건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그저 집에서 편히 쉬며 영화를 보거나 게임만 할 수 있으면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다.
서준이 보기에 가족들은 하는 일이 많고 늘 바쁘다. 엄마도 아빠도 서연이도 외국 나간 서라 누나도. 서준이 시속 10의 속도로 세상을 살고 있다면 가족들의 세상은 시속 100쯤이다. 서준이 기준에 가족들은 하나같이 빠르고 정신이 너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서준은 집에서 그런 존재다.
하지만 이런 서준을 누구도 만만하게 대하지는 못한다. 서준에게는 버티기라는 한 방이 있어서다. 일병 똥고집. 많은 경우에 서준은 가족들의 뜻에 따라주고 맞춘다. 그러나 한번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 누구도 서준의 뜻을 꺾을 순 없다.
3살 꼬마 시절. 가족들이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엄마가 태워준 작은 그네가 마음에 들었던 서준.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건만 그네에서 내릴 생각이 없다.
타이르고 야단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넷줄을 꼭 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고집을 부렸다.
“안녕하면 그네가 슬퍼요, 그네는 혼자라서 무서워요.”
아이를 억지로 그네에서 떼어 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교사였던 서준의 부모는 그런 폭력적인 방식의 훈육은 옳지 않다는 소신이 있었다.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그냥 두자고 결정했다. 그네 앞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이 모여 앉아 서준이 지쳐서 그네에서 스스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어두워지고 피곤해진 서준은 그네에서 졸다가 엄마 품에 안겨 꿈나라로 갔다.
까다롭지 않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관대한 서준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더위를 많이 타는 서준에게 가족들과의 에어컨 적정 온도 차이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여름이면 리모컨을 손에 쥐고 거실에서 꼼짝도 하질 않는다. 밥 먹을 땐 엉덩이에 깔고 앉는다.
두 번째. 아침에 눈을 뜨면 한동안은 침대에 여유롭게 누워 있기.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거나 이리저리 뒤척이며 시간을 보낸다. 일찍 일어나건, 늦게 일어나건 눈 뜨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나오는 법은 없다. 가족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끝내야 출근 준비가 수월해지는 엄마가 아들의 이런 습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항상 재촉하는 엄마와 꼼짝도 하지 않는 아들. 밥상을 치워버려 아침을 먹지 못해도, 학교에 지각하더라도, 침대에서 보내는 자신만의 아침 의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 중, 할머니 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한 날. 바람 불고 날씨가 엄청 추웠다. 하필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서준은 가족 모두가 외출 준비를 끝냈을 때까지도 침대에서 나오질 않았다. 가족들은 서준을 두고 모두 할머니에게로 가버렸다.
그러나 서준은 하나뿐인 아들 손자가 오지 않아 걱정과 근심에 밥숟가락도 들지 못하던 할머니의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서준은 느긋하게 현관에 들어섰고 반기는 할머니가 싹 다시 차려준 자신만의 진수성찬 밥상을 다 받아먹었다.
세 번째. 자신의 평범한 취향 고수. 중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많은 집의 요구를 받아들여 엄마가 꽃향기가 나는 샴푸를 사 온 적이 있다. 서준은 향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며 머리 감기를 거부했다. 결국 아들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견디지 못한 엄마가 예전에 쓰던 걸 다시 사다 줬다. 서준은 물론 엄마에게 향이 없는 샴푸를 사달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내키지 않는 걸 소신껏 하지 않았을 뿐이다.
서준의 학교생활은 무난 그 자체다. 공부에는 흥미나 관심이 없지만 규칙은 잘 지키는 편이다.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하고 온순한 학생이다. 하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전교생이 결코 잊지 못할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매번 수업마다 시 한 편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줬다. 숙제를 해 오지 않는 학생은 교실 뒤에 서 있게 했다. 몇 번 수업이 진행되면서 아이들에겐 요령이 생겼다. 그냥 한 줄만 써가면 선생님은 시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해선 지적하지 않음을 알고 난 이후부터다. 아이들은 수업 시작 바로 전에 누구랄 것도 없이 대부분 그저 아무 문장이나 써서 제출했다. 어쩌다 한 반에 한 명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시 창작을 해오는 문학 지망생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한 학기가 다 끝나갈 때까지 시 한 줄을 써내지 않아 수업 시간 내내 교실 뒤에 서 있었던 학생은 서준이 유일했다.
드디어 일 학기 마지막 국어 시간. 역시나 서준은 시를 써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숙제를 교단 앞으로 보내는 사이 서준은 알아서 뒤로 나갔다. 그때 선생님이 서준을 불러 세웠다.
“서준이는 마지막까지 숙제를 한 번도 해 오지 않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시를 제대로 쓸 자신은 없습니다. 또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한 줄 쓰는 건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우우우”
여기저기서 반 아이들의 낮은 함성이 터졌다.
“글쎄 교사에 대한 반항심인지 자신만의 신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2학기부터 서준이는 시 쓰기 숙제에서 제외합니다! 박서준, 자리로 들어가 앉아요.”
선생님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당시 서준에게 반항심이랄 건 없었다. 그저 마음에서 아니라는 결심이 서면 꿈적도 하지 않는 굳은 결기 정도는 있었다. 타고나길 그랬다. 때론 같이 사는 가족에게 뜻하지 않는 불편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서준만의 그런 결기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대단히 개인적이며 평화적인 종류의 마음가짐이었다.
17살 서준의 인생에 드디어 고민이란 것이 생겼다.
서준의 집과 학교 사이에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이어진 작은 숲길 공원이 있다. 공원 입구에는 숲길 작은 도서관도 있다. 서준은 걷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숲길 도서관에는 자주 갔다.
아담한 열람실과 서가가 있는 소박한 도서관. 서준은 산책로 쪽으로 창을 끼고 있는 열람실에 한가롭게 앉아 숲길 쳐다보기를 아주 좋아한다. 키 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나란히 서서 기다란 오솔길을 만들어 냈고, 봄에는 산벚나무가 연분홍빛 꽃으로 길을 예쁘게 단장한다.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다웠다. 날이 화창한 봄이나 가을에 창문을 열어젖히면 상쾌한 숲 냄새가 서준을 행복하게 해 줬다.
그런데 얼마 전, 작년 봄에 새로 구청장이 된 사람이 자신의 선거 공약으로 냈던 주민 복합 문화 센터 건립을 위해 숲길 공원 개발 계획이란 걸 발표했다. 산을 깎아 일반 열람실과 디지털 정보실이 있는 디지털 정보 도서관. 실내 수영장 테니스장 체육관을 갖춘 최신 스포츠 센터, 영화와 각종 문화 예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소극장이 들어서는 지하 3층 지상 5층의 건물을 짓겠다는 내용이다.
이후로 숲길 산책로와 도서관 주변이 조용할 날이 없다.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시위를 벌이기 때문이다. 서준은 멀쩡한 숲길과 도서관을 없애겠다는 개발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숲길 도서관이 사라지는 건 꼭 막고 싶었다. 뭔가 강렬한 행동 욕구가 생기는 건 서준에게 아주아주 특별한 일이다.
엄마와 아빠는 개발로 이익을 보는 주변 땅 주인들과 건설업자들이 개발을 강하게 요구하고, 심지어 돈으로 사람들을 고용해 시위를 주도한다고도 했다. 엄마와 아빠는 개발을 반대하는 다수 주민의 의견을 무시하는 그런 이기적인 행동은 공동체에 지대한 피해를 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연도 핏대를 올렸다. 도심의 허파 구실을 하는 작은 산들을 자꾸 개발하는 행위는 나날이 심각해지는 지구 온난화에 불을 붙이는 행위다. 몰 상식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야만적이다라고 흥분했다.
서준은 가족들이 말만 강하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지로 행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서준이 오다가다 보면 개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확성기를 들고 공사를 시작하라고 시끄럽게 외쳤다. 수도 많았고 조용히 해달라고 요구하는 도서관 직원들을 몸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개발을 반대하는 쪽은 한 사람씩 와서 개발 반대라는 손팻말을 들고 조용히 일인 침묵시위를 하다 돌아갔다.
이러다간 숲길도 도서관도 모두 사라질 것 같아 서준은 걱정이 컸다. 매사 태평한 서준에게 이런 일이 걱정거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 어쩌다 숲길 입구에서 문화 센터 건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맞닥뜨릴 때면 서준의 가슴에서 표현하기 힘든 울컥한 뭔가가 자꾸 올라왔다. 마치 무척 소중한 것을 정당한 이유 없이 빼앗긴 사람의 마음이랄까? 서준은 자꾸 지키고 싶어졌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금요일 오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숲길 공원이 가까워질수록 서준의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자연 파괴적인 숲 개발 계획을 당장 철회하라!”
“구청장은 주민의 행복 추구권을 보장하라!”
“무분별한 개발 산업을 반대한다!”
카랑카랑 젊은 여자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이끌려 공원
입구 안내 사무소 쪽으로 갔다. 작은 체구의 여자가 보였다. 호기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는 순간 서준은 깜짝 놀랐다.
‘이과 일등 윤재희?’
올 초에 이과반으로 전학해 온 재희는 젓 번째 중간고사에서 1등을 했다. 문과에 박서연이 있다면 이과에는 윤재희가 있다. 몇몇 남학생들은 서연과 재희는 이과 문과로 나뉘지 않았다면 분명 1등 자리를 놓고 엄청나게 경쟁하다 서로 원수가 되었을 거라며 낄낄거렸다.
재희는 조그만 확성기를 들고 야무지게 외치고 있었다. 도서관 직원이 나오자, 확성기를 끄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서준을 발견한 재희는 서준 쪽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서준 앞에서 재희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야 박서준 네가 여긴 웬일?”
“너 나 알아?”
“왜 몰라? 박서연 남자 쌍둥이. 학교에 그거 모르는 애가 있어?”
잠시 어색함에 서로 말이 없다.
“넌 여기가 통째로 없어지는 거 어떻게 생각해?”
재희가 물었다.
“반대해! 도서관이 얼마나 예쁜 곳인데 그걸 없앴다니 말도 안 되지!”
“어 너 뭘 좀 아는구나! 우리 언니가 몸이 좀 안 좋아 집에서 휴학 중이야. 그런 언니에겐 숲길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책 보는 게 유일한 낙이야.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그런데 이 좋은 걸 그따위 흔해 빠진 문화 센터 짓겠다고 허물어 버리겠다니 말도 안 돼!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할까?”
1등이라는 애들을 다 이런 걸까? 서준은 재희도 서연만큼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서준은 서연을 따라 아파트 상가의 햄버거 가게에 갔다. 재희는 햄버거까지 사주면서 서준의 구미를 당기는 제안을 했다.
“야 박서준 너 나랑 같이 문화 센터 건립 반대 시위 해 볼래?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함께 하면 파급력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까 보니까 도서관 앞은 아무래도 민폐야. 확실하게 의사 전달을 하려면 구청장실 앞에 가서 해야 해. 반대 서명을 받아 민원도 넣어야 하고. 참 호소문 같은 것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좋겠다.”
이 아이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았을지 서준은 재희가 참 대단해 보였다.
“너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아니?”
“해결책을 찾다 보면 알게 돼.”
서준은 재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거사를 ‘그것’이라고 하기로 했다.
오늘은 디데이.
서준과 재희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날이다. 서준과 재희는 학교를 마치고 함께 구청으로 향했다.
일주일 간 전교생 600명 중 400명의 반대 서명을 받았다. 평소 조용히 지내던 서준이 서명을 받으러 다니니 호응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소문도 금방 퍼졌다. 서준과 재희의 ‘그것’에 대해 알게 된 서연은 위험하다며 서준을 말렸다. 그만두지 않으면 부모님과 선생님께 알리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럴듯한 말뿐인 너는 결국 비겁한 겁쟁이’라는 서준의 도발 아닌 도발에 서연은 충격을 받았다. 결국 고민 끝에 서연은 ‘그것’에 관해 선생님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학생들의 입단속을 담당했다. 게다가 발이 넓은 서연은 후배와 선배들에게 서명을 많이 받아 왔다.
재희는 주민께 드리는 호소문을 만들었다.
‘숲은 미래 세대의 유산이니 우리 같은 청소년들의 의견을 물어 개발이 해야 한다. 우리는 숲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숲길 공원을 훼손하는 복합문화센터 건설을 반대한다’라는 내용이다.
일인 시위는 집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된 서준과 재희. 일단 재희가 구청장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서 피켓 시위를 하면, 서준이 호소문을 나눠 주고 서명지를 구청 민원과에 접수하기로 했다.
서준과 재희의 ‘그것’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재희가 구청장실 건물 입구에 피켓을 들고 있기 무섭게 구청 직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3명이 달려왔다. 이런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하니 학생들은 얼른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했다.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연 파괴적인 숲 개발 계획을 당장 철회하라! “
”구청장은 주민의 행복 추구권을 보장하라! “
”무분별한 개발 산업을 반대한다! “
행인들에게 호소문을 나눠주던 서준도 따라 외쳤다. 당황한 직원들이 서연의 피켓을 억지로 뺏으려고 했다. 서준이 달려가 재희의 앞을 막아섰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서준은 견고한 인간 장벽이다. 직원 서너 명이 더 몰려오고 있다. 재희가 서준의 뒤에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준아! 서명 용지 뺏기면 절대 안 돼! “
서준은 호소문과 서명 용지가 들어있는 백 팩을 앞으로 매고 두 팔로 끌어안은 채 깍지를 꼈다. 재희는 서준의 뒤에서 계속 목청 높여 소리쳤다.
”시민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 “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황한 직원들이 더 세게 서준을 잡아 끌어내려고 했다. 재희는 서준의 등 뒤에서 서준의 허리를 꼭 붙잡고 계속 구호를 외쳤다. 서준은 거대한 바위처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재희와 백 팩 안에 담긴 친구들의 서명지를 지켜내려 버텼다. 사람들이 점점 더 모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어 그거 너무 하는구먼. 어린 학생들인데 좀 둬요.! “
누군가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동영상을 촬영했다.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결국 직원들은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서준과 재희에게서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났다. 서준은 호소문을 꺼내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재희는 피켓을 들고 똑바로 섰다.
서준은 모든 소동 끝에 서명지를 민원과에 제출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서준과 재희는 마침내 자신들의 ‘그것’을 성공리에 마쳤다.
학교와 집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서연은 서준의 훌륭한 대변인이자 변호인이 되어줬다.
재희는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고 ‘그것’에 대해 해명했다.
부모도 선생님도 서준과 재희의 행동에 대해 뭐라 벌을 주거나 나무랄 수는 없었다. 단지 세상 시끄러운 일이 다시 일어나질 않도록 서준과 재희를 단속하려 했다.
서준과 재희의 ‘그것’은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확대 전개되었다. 그날의 동영상이 ‘청소년의 건강한 자기주장을 막아선 공권력’이라는 재목으로 유튜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여러 환경, 교육,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구청 앞 시위를 이어갔다. 숲길 공원에서는 개발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시위와 문화 행사가 주말마다 열렸다. 공영 방송국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에 활발한 자기주장을 하는 청소년들에 관한 특집 보도가 방송되었다. 드디어 구청장은 3달 만에 문화센터건립 계획을 백지화했다.
가을 하늘이 맑은 9월 오후. 서준은 학교를 마치고 숲길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직원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한다. 서준은 늘 그렇듯 숲길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소중한 것을 지켜낸 자의 충족감. 서준은 지금 무척 행복하다.
신의 관점에서 인간은 모두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가진 특별한 존재입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짝 피어나는 존재를 신은 사랑하십니다. 서준은 자라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당신의 신은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당신의 삶을 바라보고 보살펴주십니다.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