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은 브레이크를 깊게 밟았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마지막 숨까지 쥐어짜듯 내뱉었다. 몸에 절어 있는 고통을 모두 날려버리고 싶었다.
“휴가라도 좀 다녀오세요. 땀이 날 때까지 운동이나 육체 활동도 해보세요. 약에 의존한 불면증 치료는 한계가 있어요.”
약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정숙. 1년 전, 이지선 상무가 자신의 운전기사와 눈이 맞아 거액의 공금을 들고 사라져 버린 후 시작된 불면의 밤. 재정적 타격이 있었으나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정숙의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이 빛을 발해 회사는 곧 정상화되었다. 하지만 고장 난 정숙의 마음은 아직 회복 불능이다.
지선은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었다. 혈연 단신으로 상경해 김 양에서 시작해 김 과장에서 김 부장으로 마침내 김 사장으로 자수성가하기까지 40년. 지선은 정숙이 자기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20년 넘는 세월을 동고동락한 혈육 같은 존재였다. 배신감과 분노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김 기사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했으면 필요한 지원을 다 해줬을 거다. 목돈이 필요하다면 흔쾌히 주었을 거다.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했으면 두말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을 거다. 지선을 신뢰하고 아꼈던 마음은 혼자만의 일방통행이었을까? 지선은 왜 그랬을까?
지선을 너무 믿고 의지했었나? 지선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말 걸 그랬나? 아니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잘해 줄 걸 그랬나? 혼기를 넘기기 전에 좋은 신랑감을 찾아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해 줄 걸 그랬나? 그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까지의 짧은 시간 정숙의 머리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고객님 키오스크 주문 부탁드립니다.”
정숙은 직원이 알려준 기계 앞에서 뭘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세운 곳은 롯데리아.
창업 초장기 외부 영업을 다니느라 정신없던 시절. 정숙과 지선은 햄버거와 콜라로 끼니를 해결했던 때가 많았다. 고단했지만 늘어가는 거래처와 매출을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곤 했다.
어엿한 중견업체의 사장이 되고서도 정숙은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눈치 빠른 지선이 잽싸게 포장해 와 챙겨 주곤 했다. 지선이 없는 지금, 정숙은 햄버거 하나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한다.
“제가 해 줄게요.”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여자아이다.
“그럴래?”
정숙은 자신이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까 싶어 머쓱했다.
“뭐 드실 거예요?”
“가만있자…. 내가 좋아하던 건 새우가 들어간 건데.”
“아 새우버거요? 음료는요?”
“콜라.”
“감자튀김하고 세트 메뉴로 할까요.”
“그래….”
아이는 능숙한 솜씨로 주문을 끝냈다.
“도와줘서 고맙구나.”
정숙이 영수증을 받아 들고 엉거주춤했다. 그다음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의 주문을 끝낸 아이가 정숙에게 왔다.
“저랑 같이 앉으실래요?”
결국 정숙은 자신을 도와준 귀여운 소녀와 합석까지 했다.
“앞에서 꾸물대니까 답답했겠구나.”
“아니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내가 할머니랑 닮았니?.”
“네. 자동 주문 못 하는 것까지 똑같아요.”
정숙은 좀 민망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정숙과 여자아이는 마주 보고 앉아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다.
“할머니가 나처럼 햄버거를 좋아하셨구나.”
“아니요.”
정숙은 더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이 보이는 호기심이 아이에게는 경계심을 일으킬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엄마가 회사 다녀서 아기 때부터 할머니가 돌봐주셨어요. 그런데 여기 자주 데리고 오셨어요. 할머니랑 친자매처럼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너무 멀리서 살아서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수요일 1시에 이 햄버거 가게에서 만났었거든요. 할머니 친구가 햄버거랑 콜라를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이어가자, 정숙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
“요즘도 매주 마지막 주 수요일이면 두 분이 만나셔?”
“아뇨. 제가 초등학생 되었을 때 이후로 안 만나세요. 할머니가 곗돈 탔던 날 햄버거 가게에서 돈 가지고 도망치셨거든요.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대요.”
정숙은 아이의 할머니가 왠지 지금의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일 이후론 할머니랑은 햄버거 가게 같이 안 왔겠구나. “
”아뇨 계속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여기 같이 왔어요. 친구가 올 수도 있다고. 그리고 친구가 생각나면 나랑 같이 여기 왔어요.”
아이는 정숙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꼭 들려줘야 할 책임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묻기도 전에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처음에는 돈 훔쳐서 미웠대요. 그런데 미워할수록 더 생각나고 나중에는 보고 싶어 졌대요. 돈 아까운 마음보다 친구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그런 거래요. 돈은 잃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리면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했어요. 마음 줄 사람이 없으면 쓸쓸하고 슬픈 거라고.”
소녀라고 부르기도 앳된, 아직은 솜털이 보송한 아이의 얼굴을 하고 어떻게 저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지? 정숙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 마음을 저버린 친구가 생기더라도 화내고 미워하지 말랬어요. 아픈 마음을 잘 보살피고 치료하면 용서가 저절로 일어난다고 했어요. 그러면 가슴에서 더 큰 사랑을 발견한다고. 맨날 그랬어요.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할머니 말을 다 외줄 정도예요.”
정숙은 아이 말에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을 날 지경이다.
“할머니도 친구가 돈 떼먹고 도망쳤어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정숙을 쳐다봤다.
“응 그렇단다.”
“왜 할머니들은 친구한테 자꾸 돈을 떼이나 몰라. 우리 할머니처럼 도망간 친구가 보고 싶어요?”
“아니 아직은 미운데….”
정숙은 웃음이 났다.
“아마 얼마 못 가 보고 싶어질 것에요. 우리 할머니도 그랬어요.”
“가만 그런 데 오늘이 마지막 수요일이구나. 왜 할머니는 안 오셨어?”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할머니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내가 대신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1시면 여기 와요. 혹시 할머니 친구 오면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전해 주려고요.”
‘꼬마야 너 기특하다. “
”난 우리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오는 거예요. “
”그렇구나! 넌 이름이 뭐니? “
”강 예나요. 할머니는요? “
”난 박 정숙. 앞으로도 계속 올 거야? “
”아마도요, 엄마가 학원가라고만 하지 않으면요. 히히. “
아이가 밝게 웃었다.
”할머니 친구 꼭 만나길 바라,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
”네 안녕히 가세요. “
바람이 차갑다. 도시의 불빛이 일렁대는 강물을 비춘다. 정숙은 자신이 버리고 도망쳤던 사람들,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남자 형제들만 아끼고 따뜻한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엄마. 여자가 배워 뭐 하냐며 한 학기 등록금도 내주지 않았던 새아버지. 일하다 과로사라도 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혼장을 주고 떠나버린 남편. 엄마랑 살다가는 숨 막혀 죽을 것만 같다고 20살이 되자마자 독립해 버린 딸. 그토록 믿었건만 뒤통수를 치고 도망간 지선.
삶이 고통스러웠다. 상처 입은 가슴으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해서 사랑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마음이 시리게 아팠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렸다.
자신을 버렸거나 자신이 버렸던 사람들. 정숙은 사실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숙은 자신을 상처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고 싶다. 자신이 상처 주었던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버거 소녀의 말이 생각난다. 용서가 일어나면 더 큰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는.
달이 바뀌었다. 마지막 주 수요일, 정숙은 롯데리아로 차를 몰았다. 아직 1시까지는 시간이 충분하다.
정숙은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기로 약속하고 이 지구에 왔어요. 그런데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아 강력한 처방이 필요했어요. 지선이 정숙의 운전기사랑 바람난 일도, 버거 소녀와의 만남도 모두 세심한 신의 개입입니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필연이란 걸 잊지 마시길.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