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사, 비 오는 날 2

by Sabina

박여사는 오랜만에 화장대에 앉았다. 70이 넘으니 어쩌다 모임이나 있으면 모를까, 절에 기도하러 갈 때는 적당히 크림이나 발라주니 화장할 일은 점점 줄어만 갔다.

박 여사는 아침에 절친 문 여사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청소하다 허리를 다쳐 병원에 와 있으니 대신 초등학생 손녀딸의 녹색 어머니 봉사 좀 해달라고. 문 여사는 직장이 먼 막내딸의 늦둥이 딸내미를 챙기느라 늘 바빴다. 절친의 부탁이니 흔쾌히 들어줬다.


그런데 난감했다. 손자 손녀들은 이미 다 장성해 학교가 그것도 초등학교는 너무 낯설었다. 나이 드니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면 실수가 잦아 그것도 좀 걱정이다. 일단 좀 젊어 보이고 싶었다. 자신에게 관심 가질 사람은 없겠지만 젊은 엄마들만 잔뜩 있는 학교에서 너무 늙은이 취급받는 건 싫었다. 정성스럽게 화장하고 자신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친구들이 추켜세웠던 꽃무늬가 조금은 화려한 남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벅 여사는 현관의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점검했다. 이 정도면 70까진 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12시 20분이다. 12시 30분까지 모이라고 했으나 좀 일찍 가보기로 했다. 1층 행정실 옆에 학부모 대기실 비슷한 곳이었다. 대표 엄마는 벌써 와 있었다. 아이 이름을 대니 초록색 조끼를 내어 주었다. 박 여사는 교문 앞에서 아이들이 갑자기 찻길로 뛰어나가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는 역할을 맡았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12시 40분부터 저학년 학생들의 하교가 시작된다고 했다.


박 여사는 조끼를 입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는데 당황스러웠다. 나왔던 건물로 들어가니 대표 엄마가 커다란 녹색 우산을 나눠 주고 있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아침에도 하늘은 맑았었다. 박 여사는 문득 오늘 날씨가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리 우산을 가지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엄마들이 몰려와 학교가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찾아 바쁘게 운동장을 오갔다. 비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 여사는 복잡한 학교 앞에서 넘어지는 아이가 없도록 주변을 살폈다. 거세게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문 밖으로 내달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박 여사는 이런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기 전에 멈춰 세우고 뛰어나가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얼굴에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한 아이들을 자제시키기는 신경이 많이 쓰였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니 운동장은 조금씩 한산해졌다. 그러나 교문 밖은 아직도 시장통처럼 무척 혼잡하다. 우산을 받치니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 건널목 봉사를 담당한 엄마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복잡하니 통제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문방구와 편의점 옆의 골몰에 차를 세워뒀던 엄마들이 아이들 태우고 도로로 빠져나와 학교 앞 대로의 진입이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교통경찰이 와서 통행 정리를 시작했다. 엄마들의 일이 수월해졌다. 이제 교문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박 여사는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혹여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고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있나 살펴봤다. 이제야 엄마를 만나 밖으로 걸어 나가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학교 밖은 아직도 복잡했지만, 학교 안은 꽤 조용하다.


교실 건물의 1층 출입구에서 여자아기 울고 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옅은 푸른색 체크 원피스를 입은 아이. 하지만 빗소리에 묻혀 아이가 울고 있는 걸 처음에는 잘 알 수 없었다.


박 여사는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 박 여사는 아이가 너무 짠하고 딱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쉬운 대로 조끼 주머니에 챙겨 왔던 휴지를 꺼내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며 물었다.


“꼬마야 왜 울어? 엄마가 안 왔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에 데려다줄까? 몇 학년 몇 반이야.”


“1학년 3반인데 교실에 아무도 없어요.”


엄마를 기다려도 오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혹시나 해서 이미 교실까지 다녀온 듯하다.


“엄마가 바쁜 일이 있나 보네.”


갑자기 아이가 더 크게 소리 내 서럽게 울었다.


“엄마는 동생 보느라 집에만 있는데 나만 엄마가 안 왔어요.”

박 여사는 엄마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속상하고 섭섭했을 아이가 안쓰러웠다.

“집이 어디야 할머니가 데려다줄까?”


“엄마가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어요.”


아이가 낯선 사람이라고 말하긴 했어도 박 여사가 느끼기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눈물과 콧물을 닦아준 나이 든 노인네에게 경계심을 가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 엄마한테 전화해 볼까?”


박 여사는 아이가 불러주는 번호로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할머니 녹색 어머니회 봉사하러 온 거야.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할머니가 집에 데려다줄게. 가는 길에 엄마한테 또 전화해 보고.”


아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여사는 우산을 받쳐 들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작고 앙증맞은 아이의 손이 차갑다.


“이름이 뭐니?”


“윤 하서.”


“동생이 몇 살인데?”


“네 살 하고 두 살이요.”


“어머나 동생이 둘이나 돼?”


“네 엄마는 맨날 정신이 없어요.”


“맞아. 할머니도 애가 셋이었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게.”


“그럼 할머니도 비 오는 데 학교로 데리러 가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아마 그랬을걸.”


이런 어린것이 셋이나 되는 애를 키우느라 고된 엄마의 속 사정을 알 리 없다. 그저 오지 않는 엄마가 야속할 뿐이다. 비는 계속 내렸다. 잠시 왔다 그칠 소나기가 아닌 듯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났다. 아이가 움찔 놀라 박 여사의 속을 꽉 잡았다.


“괜찮아 멀리서 나는 소리란다.”


교문 밖은 아직도 붐볐다. 박 여사는 아이가 일러준 대로 가기 위해 건널목에 섰다. 아이의 집은 걸어서 제법 가야 하는 거리다. 어린아이가 비를 맞으며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박 여사는 아이가 자신이라도 만나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서야! 하서야!”


건널목 건너편에서 갓난아기를 가슴띠로 맨 채 우산을 든 젊은 여자가 큰 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엄마!”


아이가 신나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러 왔고 결국 아이와 엄마가 만났다. 박 여사는 정말 기뻤다. 아이의 작은 가슴에 생채기 날 일은 없을 거다. 가슴에서 ‘부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드디어 아이가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감사합니다.”


애 엄마가 계속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였다.


“아니 영란아.”


박 여사는 애 엄마 뒤에서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작은 우연조차 신의 장대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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