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비 오는 날 1

by Sabina

영란은 하루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근래 들어 쉬이 피곤해지고 체중이 줄었다. 갱년기 증상이겠거니 추측했다. 그러나 밤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지니 걱정이 되었다, 집 근처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라도 해 볼 참이다.


정문을 나와 큰 도로를 낀 학원 건물 2층의 최현주 가정 의학과. 영란은 건물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병원으로 잽싸게 올라갔다. 10시가 조금 넘었는데 병원은 벌써 대기실까지 환자로 꼭 찼다. 영란의 대기 번호는 31번. 제법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지만 가까이에 마땅한 병원이 없어서인지 항상 환자가 많다. 의사는 최현주 원장 단 한 명. 간호사는 4명. 크지 않은 병원이지만 영란 또래의 여자 의사 혼자서 하루에 이 많은 환자를 혼자 감당하다니 올 때마다 신기했다. 게다가 의사는 친절하고 꼼꼼하기까지 했다.

마주 보고 있는 대기실의 긴 의자. 경험상 족히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그래봤자 환자 한 명당 5분도 되지 않는 진료 시간이다. 가정의학과의 특성상 대기실에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많다. 중병은 아닐지라도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연령대니 당연하다.


영란과 마주 보고 있는 의자에는 젊은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씨름 중이다. 걷지도 못하는 한 7~8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열이 나는지 칭얼거렸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웠다가 품에 안았다가 엄마는 정신이 없다.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여자아이가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딱 들러붙어 있다.

비쩍 마른 몸에 부스스한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애 엄마는 가만 보면 꽤 예쁜 얼굴이다. 하지만 온몸에 피곤이 하나 가득하고 보채는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걱정과 근심이 넘쳐났다.


“은서야 좀 똑바로 앉을래?”


짜증 섞인 말이다. 여자아이가 엄마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자석처럼 엄마에게 붙었다. 안고 있는 아이가 더 크게 울었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 다독였다. 아픈 아이는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영란은 자꾸만 젊은 애 엄마에게 신경이 쓰였다. 영란은 직장을 다니는 동안 시어머니가 아이 둘을 맡아 키워주셨다. 힘든 시기였지만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어쩌다 모임에라도 가면 전업주부였던 친구들은 집에서 종일 혼자 아이 보고 살림하는 일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었다. 배불러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쩔쩔매는 저 엄마를 보니 20년도 더 지났건만 애 키우는 일은 여전히 고되구나 싶었다.


의자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있던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따분하고 심심해 죽을 맛인듯하다. 영란은 가방에 있는 초콜릿이 떠올랐다. 운전하다 졸리면 먹으려고 넣어 온 것이다.


“이거 먹을래?”


여자아이는 영란이 권하는 초콜릿을 보다 엄마를 쳐다봤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주는 건 아무거나 받아먹지 말라고 엄마가 단단히 일렀을 거다. 영란도 아이가 저 나이일 때, 늘 주의를 주곤 했었으니까.


“먹어. 감사합니다.”


애 엄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달콤한 것이 입에 들어가자 잠시 얌전해졌다.


“혹시 대기 번호 몇 번이에요?”


영란이 물었다.


“30번이요.”


“바꿔주려고 했는데 나보다 먼저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아픈 아기는 잠시 잠이 들었다. 초콜릿을 다 먹은 여자아이는 대기실에 익숙해져서 돌아다녔다.


“은서야 얌전히 앉아 있어.‘


엄마가 주의를 줬다.

대기실에는 꼬마 환자들을 위한 그림책이 많았다. 영란은 몇 권 가져와 엄마에게 들러붙으려는 아이를 꼬드겼다.


”그림책 읽어줄까? “


아이가 냉큼 영란 곁으로 와 앉았다. 얼굴이 하얗고 쌍꺼풀 있는 눈이 동그랗고 커다라니 아주 예쁘게 생긴 아이다. 하얀색 레이스가 달린 빨간 원피스도 잘 어울렸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


아이는 까르르 웃었다.

대학생이 된 자신의 아이에게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어줬던 그림책을 아직도 아이들이 좋아하다니 영란은 놀랐다.

백설 공주, 신데렐라 공주, 인어 공주. 아니 지금도 공주가 인기인가? 먹고 사느라 바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영란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는데 아직도 공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책이 많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란은 아이에게 족히 10권의 그림책을 읽어줬다. 이렇게라도 애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다.

영란은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거나 선의로 도움을 주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 영란. 늘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언니는 처음이라 대접받고 남동생은 막내라서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 영란은 부모의 관심에서 항상 밀리는 서열이었다. 내 것 챙기기도 쉽지 않았으니 남의 사정 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자꾸 저 젊은 엄마에게 관심이 갔다.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갑자기 먹고 싶어 진다거나, 소원해진 친구가 보고 싶어 불쑥 전화한다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맘이 움직여, 나도 모르게 몸이 그곳으로 향하게 되는 그런 경험. 영란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의사는 갑상선 질환이 의심된다며 피검사를 권했다. 영란은 채혈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동을 걸고 차를 빼기 위해 좌우를 살폈다. 예보에도 없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벌써 1시다. 영란은 시동을 걸었다. 좌우를 살폈다.


영란은 약국 앞에서 조금 전에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던 여자아이와 엄마를 발견했다. 어린아이는 가슴에 매달고 한 손으로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접힌 유모차를 잡은 채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엄마. 미처 우산을 준비해 오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설령 우산이 있었다고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도 않다. 비 오는 날 어린아이 둘을 혼자서 건사하기에는 엄마의 두 손만으로는 부족했다.

영란은 천천히 차를 몰아 약국 앞에 세웠다. 창문을 내리고 애 엄마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일단 타요. “


그러나 애 엄마는 혼자 힘으로는 차에 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영란은 차에서 내려 트렁크의 우산을 꺼내 펼친 후 엄마 손에 쥐어 주었다. 아픈 아기가 비를 맞으면 낭패다.


”잠깐 기다려요.’


영란은 자신을 은서라고 자꾸 확인시켜 주는 아이를 먼저 차에 태우고 엄마가 아기와 함께 차에 탈 수 있도록 우산을 받쳐주었다. 그리고선 유모차를 트렁크에 실었다.


“집이 어디예요?”


대답이 없다. 영란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애 엄마가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는 엄마를 보고 은서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차 안이 아이 울음소리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남편은 출장 중이고 친정엄마도 여행 가셨어요. 도우미 이모님은 오늘 쉬는 날이라 연락도 안 되고…. 갑자기 비까지 오니까…. 큰애가 우산도 가져가지 않았는데 어쩜 좋아요. “


애가 또 있다는 말에 영란은 잠깐 당황했다.


”오늘 같은 날 엄마 혼자 애들 건사하기 힘들겠어요. 큰애 학교가 어디예요? 우선 거기로 갑시다. 학교에서 큰 애까지 태워 집에 내려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은서 엄마랑 나랑 무슨 인연이 있나 봐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요. 도와줄게요.”


병원에서 학교까지는 10분 정도 거리였다. 갑자기 내린 비로 학교 앞은 복잡했다.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들과 자동차가 서로 엉켜있다.


“편한 곳에 잠깐 계시면 제가 아이 데려올게요.”


하지만 일이 예상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자고 있고 갓난쟁이가 일어나 보채기 시작했고 엄마와 떨어지기 불안했던 은서도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영란은 학교 옆 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애 엄마와 함께 학교로 갔다. 마음이 바쁜 애 엄마가 앞장서고 영란은 꼬마의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진다. 영란은 어서 이 가족을 집에 데려다주고 쉬고 싶었다. 애 엄마는 학교 정문 앞 건널목에서 두리번거리며 아이를 찾았다.


“하서야!”


애 엄마가 교문을 걸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를 발견했는지 큰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하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산을 받쳐주는 노인의 손을 잡고 건널목으로 걸어왔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애 엄마도 아이도 잠시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섰다. 영란도 걸음을 멈췄다. 영란은 아이의 손을 잡은 노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엄마…?


신이 우리의 삶에 숨겨 놓은 신비를 발견한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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