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첸나이 어드벤처

by Sabina

요란한 새소리에 눈을 떴다.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가 진우를 내려 보고 있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진우를 내려 보고 있던 눈동자가 더 커지며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눈이 부시다. 낯선 곳.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관리가 잘 된 깔끔한 공원. 벤치에 누워 자고 있던 동양 남자가 신기했나? 열 살 남짓한 꼬마 셋이 진우를 키득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분명 어제 첸나이 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택시를 탔었다. 한국에서 왔다니 Kpop 팬이라며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어 갔던 택시 기사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은 아난드. 진우와 비슷한 연배. 그는 결혼해서 남매가 있다고 했다. 관광 가이드가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까지 적어 줬던 것 같다. 그리고 번잡했던 거리에서 차가 막혔다. 아난드라는 기사가 노점에서 코코넛 워터를 사다 준 것까지 생각났다. 미지근하고 달짝지근한 맛.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최 대리는 딱 1 프로가 아쉬워. 믿음직스러운데 뭐랄까? 너무 반전이 없어.”


모두의 추측과 달리 입사 동기 김 대리가 진우보다 먼저 과장 진급을 한 날, 술자리에서 부장이 했던 말.

승진에서 밀리고 나니 오기라도 부리고 싶었다. 묵묵히 일만 하는 재미없는 사람 없이 한 번 잘들 해보라는 심보도 있었다. 암튼 계획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진우가 느닷없이 2주 휴가를 냈다. 그렇게 모두에게 보란 듯이 반전을 선사하고 여기까지 오기는 했다. 평소의 진우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나라 인도로.

하필 이럴 때 맞닥트린 최진우 인생 최고의 위기 상황. 가방도 지갑도 신분증도 핸드폰도 없다. 온통 불확실하다. 게다가 머리는 텅 비어 아무 생각이 없다. 국제 미아가 되었는데 신기하게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적이자 10달러짜리 지폐 3장과 500루피가 나왔다. 옆에는 이불 대신 덮고 잔 듯한 옷가지들이 구겨져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전부 자기 것이 아니다. 상표도 떼지 않는 셔츠와 바지 스웨터까지 모두 새것이다. 게다가 명품 버버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궁금증도 생각도 추측도 없었다.


목이 말랐다. 본능에 따라 몸이 움직였다. 아이들에게 ‘water’를 외치자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공원을 나와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문을 열기 시작한 상점들과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릭샤가 다니고 코코넛 워터와 망고 주스를 파는 노점들이 보였다.

노점상에게 남은 옷가지들을 다 주고 망고 주스 세 병과 생수 한 병을 얻었다. 주스 두 병은 아이들에게 나눠 마시라고 줬다. 갈증이 가시고 이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우가 자신의 조력자들에게 ‘폴리스’를 외치자, 길거리 끝을 가르친다. 고맙다고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 경찰서가 있다는 방향으로 걸었다. 한참을 가도 경찰서는 보이지 않는다. 배가 고팠다. 문을 연 작은 카페에 들러 진한 에스프레소와 알록달록한 설탕 가루가 뿌려진 도넛을 한 개 사서 먹었다. 천상의 맛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험상궂은 사내가 요란스럽게 들어왔다. 육중한 몸에 꽉 끼는 제복. 반갑게도 그는 경찰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오늘은 토요일. 진우가 첸나이 공항에 도착한 날이 수요일 오전이었으니 진우는 약 3일간의 행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축제 기간이고 토요일이라 대사관은 월요일이 되어야 일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대신 그가 데려다준 곳은 시내에서 제일 큰 한국 식당 아리랑. 같은 동포끼리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한국의 가족과 통화 후 전후 사정과 신원을 파악한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신이 운영하는 guest housed에 머물게 해 줬다.


인도는 일 처리 속도가 매우 느렸다. 경찰은 진우 사건을 접수했다. 진우가 합법적으로 입국했음이 확인되자 더 이상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인도를 떠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있다. 그동안 먹고 잘 수 있는 곳도 생겼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guest house의 인도인 매니저 비끄람의 잡무를 짬짬이 도와줬다. 비끄람은 덩치고 크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다. 영어는 꽤 유창했고 어눌하지만, 한국말도 제법 했다. 진우는 한국인 손님들의 환전 업무를 도와 주거냐 그들의 요구 사항을 비끄람에게 영어로 통역해 주는 일을 했다. 간혹 중국이나 유럽 손님들이 오기도 했다. 진우는 짐을 들어주기도 했고 비끄람 대신 근처 슈퍼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금세 지났다. 비끄람은 도와줘서 고맙다며 일 마치고는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줬다. 신의 나라답게 크고 작은 아름다운 사원이 많았다. 그를 따라 꽃과 향을 올리며 기도도 했다. 사장은 진우가 있어 일이 수월하다면 용돈을 좀 쥐여줬다. 돈이 생기면 guest house 근처 쇼핑몰에 가 피자나 커피를 사 먹었다. 인도 커피는 무척 진하고, 피자는 기름졌다.


경찰서나 대사관 일마저 없는 한가한 날이면 혼자 그냥 돌아다녔다. 사람 구경, 시장 구경, 더운 나라 경치 구경, 온 세상이 구경거리 천지였다.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길거리에서 짜이나 로띠, 아이스크림을 사 군것질했다. 행복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진우는 가진 돈 30달러 500루피로 부족함이 없었다.


3주가 흘렀다.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틀 후면 돌아간다. 내일 사장이 간단한 송별 파티를 해준다고 했다. 그동안 정이 들었다. 특히 지배인 비끄람은 헤어지려니 서운하기까지 했다.

대사관에서 소지품 모두를 찾은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가서 확인해 보니 여행용 캐리어와 여권 핸드폰 지갑이 들어 있는 크로스 가방까지 분명 자기 것이 분명했다. 대사관 앞에 누군가 두고 갔다고 했다. 신의 나라여서 그런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다. 어느새 진우도 따져 묻고 생각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돌아와 핸드폰 전원을 켰다. 누가 충전했나? 배터리 용량이 충분했다. 쉼 없이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한 동영상. 자신을 태웠던 택시 운전사 아난드였다.



안녕 진우. 여행은 어땠나? 만족스러웠나? 친구는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즐기는 여행을 해야만 했네.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지. 삶을 즐기기. 그래서 내가 솜씨를 좀 발휘했지.


친구는 도착한 날 망각의 물을 마셨다네. 내가 준 코코넛 워터 말일세. 그걸 마시면 3일 동안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지.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경험을 한정하는 인간의 오랜 습성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그랬다네. 덕분에 자네 3일 동안 얼마나 자유롭고 기뻤는지 모를 걸세. 당분간 생각 없이 살아야 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네. 부작용인지 축복인지는 친구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자네가 기억 못 하는 3일, 내가 함께 있었다네. 행복한 날들이었네. 자네 노래와 춤 솜씨가 제법 수준급이더군. 자전거랑 오토바이도 아주 잘 타고. 자네가 참 인정 많고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나? 여자 꼬시는 재주도 탁월하고. 바다 수영은 왜 그리 좋아하나? 참 쇼핑도 아주 신나게 하던데. 이 셔츠도 자네가 사준 걸세. 명품이라면서. 차려입으니 무척 근사하더군. 앞으로도 종종 그렇게 멋지게 입고 가족과 좋은 곳에 다니게나.


헤어지던 날 그렇게 공원에 친구를 혼자 두고 오려니 좀 걱정은 되었네. 그런데 아주 잘 지내더군. 앞으로도 처음 하는 여행처럼 모든 순간을 기쁘게 즐기며 살길 바라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미카엘이라고 하네. 이 좋은 세상에서, 당신이 평생 계획하고 준비만 하다가 죽을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자비로운 신이 보낸 도우미 천사지.


참 망각의 주스를 마시고 잃어버렸던 3일간의 기억은 석 달이 지나면 돌아올 걸세. 부디 좋은 추억으로 남길. 그럼 잘 가시게나.



진우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헷갈렸다. 하긴 여긴 신의 나라. 인도. 어쩌면 이 먼 인도까지 혼자 여행 온 것 자체가 꿈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련과 도전은 예쁘지 않은 상자에 포장된 신의 선물이랍니다. -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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