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2021
침착한 문장들 아래에서 무엇인가 새어나오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촛불의 빛을 타고 끈끈하게 흘러 나오는 것, 팥죽처럼 엉긴 것, 피비린내 나는것이 있다. /P276
책을 구매한 건 구월 중순. 해를 넘기기까지 두어 번 들었다 내려놓았다. 책이 너무 무거워서, 읽고 나면 지나치게 가벼워진 나를 깨닫게 될 것 같아서. 책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첫 장을 넘긴 나를 혼내킬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파아란 표지가 눈에 띈 건 도서관에 다녀와 읽을 책을 잔뜩 빌려온 날이었다.
학기를 마치니 온갖 자극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표정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점쳐보는 것도, 책임과 권리 속에서 적당한 선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도, 날 선 말에 내 마음을 보호하려 급히 나만의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도 그만두고 싶은 날. 번쩍거리는 휴대폰을 꺼놓고 마음으로 깊이 내려가기 위해 도서관에 다녀왔다.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적당히만 부담스러운, 갑작스레 덮을 일 없는 책들로 고심해 골라왔지만 결국 집어 든 건 이 책이었다. 마음의 짐이 되어 읽지도 치우지도 못하고 내내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책. 끈적한 피, 가늠하지 못할 어둠이 묻어있는 검은 나무들, 사적인 시간을 기어코 침범해내고야 마는 악몽들. 듣고 싶지 않은 마음과 들어야 하는 마음 사이에 있는 화자.
그래, 이 사건에 대한 책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이 놓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피비린내가 책에서 진하게 진동했다. 피와 죽음이 얼마나 오래 그 흔적을 남기는지, 남아서 그곳에 있던 모두를 얼마나 깊게 아래로 더 아래로 침전시키는지. 그러나 한계를 초과한 폭력은 제거된 채 기록했다고 책은 말하고 있었다.
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 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적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년 동안 삭은 뼈들이 인광에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 P286
기한 없이 미뤄진 작별이 이상하지 않다. 촘촘하게 내리는 눈송이를 볼 때, 살을 에일 듯이 몰아붙이는 추위를 느낄 때, 바다 건너 가장 밑에 있는 고립된 섬을 생각할 때 나도 안에서부터 피어나오는 한기를 함께 느낄 것 같다.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