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지 Feb 15. 2022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독후감] 박완서 에세이, 세계사, 2020 

70대 노인, 여성이면서 문학인, 이제 고인이 된 이의 글을 뒤늦게 본다는 건 그리우면서도 평온한 경험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 나이 언저리 글쓴이는 나만큼 흔들리고 혼란한 화자다. 그런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불안을 꺼내주고 또 나름의 결단을 내리게 도와주기도 한다. 생동감있고 생생한 글을 만나게 된다.


박완서 작가의 글을 평온하다 느낀 건, 그만큼 그가 거리감이 있는 화자이기 때문이다. 길을 지나는 중인 사람과 이미 지난 사람의 글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박완서 작가는 이미 지난 길을 묘사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화자다. 그는 함부로 충고하지 않고 또 강요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대접받는 게 힘들어 가족의 집에도 잘 머물지 않았다는 본인의 설명같은 글이 이 책에 놓여 있다. 


책을 다 보고 나서 에세이 한 편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우연히 자신이 다녔던 학교 앞을 지나가며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여학교 앞을 지나가다 화자는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루 종일 빠듯하게 일정을 계획하지만 허둥지둥 걸음하며 조그마한 예기치 못함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에게서 시간이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쉰 살이었던 그는 아름다운 결단을 내리며 그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계획 밖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면서 가슴을 두근대고 싶다." 쉰 살이 되어도 그런 걸(?) 고민한다는 화자의 말이 위로가 된다. 꿈을 완결짓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급해진 나를 유보하기로 했다.


숱한 꿈은 자라면서 맞닥뜨린 현실에 혼비백산, 지금은 그 편린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생각해낼 수가 없다. 다만 그 꿈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 늙어 가고 있음을 알 뿐이다. ... 계획한 시간을 예기치 않은 일에 빼앗길까봐 인색하게 굴다 보니까 거의 시계처럼 살려니 꿈이 용납되지 않는다. 낮에 꾸는 꿈이란 별건가.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가 즉 꿈일 수 있겠는데 나는 그걸 기피하고 다만 시계처럼 하루를 보내기에 급급하다. _꿈을 꿀 희망, 꿈, 65Page


또 한 편을 소개하자면 '환하고도 슬픈 얼굴' 챕터 속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습작도 없이 써내린 첫 책 이후 그는 자고 있는 남편 옆에서 끄적 끄적 글을 썼다. 엎드려서 몰래, 끄적끄적. 그 이유에 대해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밝은 대낮에 드러내놓고 쓰기 부끄러웠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요 바닥에 엎드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뭔가 쓰는 일은 분수에 맞는 옷처럼 나에게 편하다"라고 말한다. 한 밤 중 쓰고픈 말이 있어 끄적댔다는 글에 대한 애정이, 그럼에도 글 쓰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교만을 경계하는 겸손함이 그 에피소드를 내 마음에 진하게 남긴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_ 환하고도 슬픈 얼굴,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221Page


재미있고 유쾌하다. 빠르게 읽히고 오래 남을 것 같은 에세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금이 우리의 최선이었다고 믿어줍시다"는 마지막 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