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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Aug 14. 2021

[개샛길]뱃사람

개-샛길 프로젝트 세 번째, 주원 이야기

이 글은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개-샛길 프로젝트는 획일적인 목표를 강요하는 사회 압박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샛길로 빠져보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는 2021년 12월까지 주위 사람 100명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글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삶이 무료한 사람에겐 모든 순간이 반짝이는 극적 장면임을, 삶이 풍랑 같다고 느끼는 이에겐 결국 삶이란 조각들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걸 전달해 따스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표현으로 글이 누군갈 찌르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기꺼이 제 주위가 되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뱃사람


한 아이가 있다. 그는 바다 위에 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오색빛깔 물고기들과 밤낮으로 철썩철썩 소리 내는 파도 위에 있다. 또 그는 아직 보지 못한 시집 오십 권과 온갖 세상 사는 철학들이 담긴 소설 오십 권, 그의 낡은 성경책을 실은 배 안에 있다. 또 그는 원할 때마다 햇살을 얼굴 위에 따스하게 내려주는 해와 드넓게 펼쳐진 수많은 별 아래에 있다. 그의 사방은 반짝임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항해한다. 그가 찾는 것은 단연코 끝이며 마침이다. 태어난 이후 모든 것을 오직 시작하기만 한 그가 끝에 끌리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그는 언젠가 허름한 책꽂이에서 세상의 끝에 관한 이야기를 읽게 됐다. 고개를 돌리는 어디든 하얀 백합이 떠 있고 바다에서 단맛이 나는 그곳. 


단숨에 매료된 그는 그날로 얼마 없는 짐을 챙겨 바다로 갔다. 그가 항해하기 이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중요하지 않다. 설사 그가 살인자요, 도둑이었다 하더라도 바다 위에선 그 무엇도 중요치 않다. 바다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향하는 그 길이 맞는 길인가, 얼마큼 다다를 수 있는가 뿐이다. 그는 오직 순간과 지금을 살고 있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는 미래는 후회와 불안을 가져다주는 짐일 뿐이다. 


자유, 자유, 자유. 그는 뱃머리에 앉아 혀에 단어를 굴려본다. 해방이나 흥겨움, 안정과는 어감이 달랐다. 자유는 좀 더 온전한 느낌이다.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온전이라니, 왜 갑자기 온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그는 방에 급히 달려가 성경책만큼이나 낡은 사전을 들고 나온다. 온:전-하다, 본바탕대로 고스란하다. 그는 단어를 생각해내고 나서야 그 단어의 뜻을 알게 됐다. 순서가 얽혔다.


그의 귓가에 온전함을 속삭여준 존재는 누구인가. 그 존재는 그가 온전해지길 바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온전한, 무엇인가. 온전한 하루? 온전한 상태? 온전한 나? 한참을 골똘하다 그는 사전을 탁 소리 나게 덮고 뱃머리에서 일어났다. 끝이 없는 물음이며 답을 찾아내지 못할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고듦을 멈춘다. 


허기진 그는 부엌으로 향한다. 가끔 그는 배가 고프거나 몸이 피로한 감각들에 감사했다. 그래도 아직 그가 땅에 두 발 붙이며 살아가고 있음을 일깨우곤 했기에. 그는 엊그제 서투른 솜씨로 잡은 물고기를 구워 먹는다. 다음번에 조리할 땐 간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서투른 솜씨로 사용한 집기들을 설거지한다. 

저녁 식사 이후와 자기 전까지의 시간은 선원들이 가장 마음 놓고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짬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원들이 어울리기 시작한다. 그도 함께 갑판으로 올라간다. 항해를 막 시작했을 무렵, 그는 기어코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겠다며 고독하게 투지를 불태웠다. 


초반에 그는 위대한 항해를 시작한 이들이 빨래니, 저녁 식사 메뉴니 시답잖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고독하게 지냈는데, 고독함은 그의 어떤 면은 단련시켰으나 다른 면은 약해지게 만들었다. 외로웠고 그리웠다. 항해의 어떤 면은 추상적이었으나 다른 면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아니, 현실적이기보단 일상적이었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물소리가 아득하다. 어렴풋이 꿈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느낀다. 꿈은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음속 소망이 아주 크게 부풀어 올랐음을 느낀다. 무딘 바늘로도 펑 하고 터질 만큼. 소망의 거대함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가슴 설레는 예감이 들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았다. 간절하고 깊은 소망일수록 혀끝에 음미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끝자락이 가까울수록 입술은 더 굳게 다물어졌다. 


뱃머리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 다들 갑판으로 나와보라고. 가슴이 더 빠르게 뛴다. 두근두근. 선원들의 얼굴이 경직되는 게 보인다. 너무나도 오랜 소망이 드디어 눈앞으로 다가오는 날이므로, 누구도 쉽게 환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건한 침묵이 감돈다. 


갑판에 올라 지평선을 바라본다. 백합, 백합이 있었다. 새하얀 백합이 바닷물에 비춰 사방이 하얗고 파랗다. 오래도록 상상에만 머물렀던 그의 소망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마지막이 올 때 어떤 기분이 들까. 허망하단 생각이 들 때마다 더욱 필사적으로 상상하곤 했다. 이건 뭐랄까, 그래 한마디로 말해 온전해지는 느낌이다.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완성에서 오는 온전함.


참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바다에서 단 맛이 난다. 선원들도 따라 바다로 뛰어내린다. 여기저기서 풍덩 소리가 난다. 여기저기서 물이 튀고 모두가 정신없이 바닷물을 마셔본다. 


배에 매달려 백합을 지나 지평선 가까이 나아간다. 조금만 더 가까이. 마음이 애달프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이야기 속 생략된 세상의 끝의 실체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자유, 진정한 온전함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꿈이지만은 아닐, 그 꿈은 매일 밤 찾아온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가 끝까지 항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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