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매를 키우신 힘의 원천
여자 사람만 5명인 시끄럽고 부산한 집,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이 빌 날이 없어 날이면 날마다 다투던, 대구에 위치한 바람 잘 날 없던 우리 집에서 나의 어머니께서는 무려 4명의 딸아이들을 낳고 기르셨다. 아직까지도 손아래 두 명의 동생이 부모님과 그 집에 살고 있으니, 같은 터전에서 3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진행 중인 우리 가족의 삶. 이 왁자하고 따뜻한 가족의 역사는 모두 어머니의 ‘미역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4명을 출산하셨을 때마다 어김없이 몇 달을 미역국으로 끼니를 해결하셨다. 하루 세 끼 모두 미역국과 밥만 드시는 어머니를 보고 어린 나는 ‘아,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아주아주 좋아하시는 구나’ 생각했다. 물론 나와 연년생인 둘째 동생을 낳으셨을 때에는 내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그 때도 미역국만 줄기차게 드셨다고 하셨다. 우리와 6살, 9살 터울인 아래 동생들을 낳으셨을 때에는 우리가 어머니의 육아를 조금이나마 손을 보탰는데, 넷째까지 출산하신 이 경상도 시골 출신의 슈퍼우먼 어머니께서는 기어코 막내까지도 모유수유를 고집하셨다. 지금에서도 다시 돌아보자면 그것 또한 어머니께서 목숨 걸고(?) 드시던 미역국 덕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 어머니 나이로 이미 두 딸을 낳아 기르고 계셨을 나이에 다다른 내가 생각하기엔 억만금을 준대도 못 할 일을 어머니께선 혼자서 모두 해내셨다. 어렸던 나의 눈에도, 훌쩍 자란 지금 나의 눈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대단하고 놀라우신 인물이다.
그런 어머니께서 가장 아끼시는 미역국 레시피는 그 흔한 - 물론 IMF를 지나온 우리 유년기에는 흔하지 않았지만 - 고기도, 해산물도 들어가지 않은 맑은 국물에 외할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어 빻으신 들깨가루를 걸쭉하도록 타 드시던 들깨 미역국이셨다. 그 미역국에 밥을 말아 특별한 반찬 없이도 맛있게 후룩후룩 드시던 어머니가 내겐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가리는 음식 없이 무엇이든 잘 먹던 내가 단 하나 입에 대지도 않는 음식이 있었으니, 그것 또한 미역국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갓난아기 때부터도 미역국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맛, 냄새, 식감까지 전부가 싫다고 외치던 고집스런 어린이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에는 급식소에서 영양사 선생님이 밥을 남기지 못하게 식판 검사를 하셨는데, 나는 미역국이 나오는 날이면 식단표를 보고 그 날짜를 체크해 가면서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미역을 먹지 못해서 통과를 시켜주시지 않아 식판을 들고 벌을 섰던 때도 있었고, 코를 막고 맹물을 들이켜 가며 미역을 억지로 삼켜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날은 어머니께 그날 일을 일러바쳤는데, 어머니께서는 누가 우리 귀한 딸을 괴롭혔어! 하시는 동시에 은근슬쩍 이제 그럼 미역국을 먹어보기 시작하는 건 어때? 하는 제안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고, 그런 나를 귀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 그리고 언니는 그 맛있는 걸 왜 먹지 않을까 갸웃거리며 바라보던 동생까지 모두 내가 아닌 미역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역국 고문은 내가 성인이 되어 급식을 탈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집에서조차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이시는 날이면, 냄새 때문에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며 나온다 해도 코를 막고 숨을 참아야 했다. 중학생이 되고 부터는, ‘제 생일 때는 제발 미역국을 끓이지 말아달’라고, 그걸 선물 대신 받겠다던 날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그 날들이 모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 국 하나 때문에 너무도 괴로웠다. 정말.
그런 미역국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산후 미역국 테라피 Therapy 였다. 내가 7살일 적에 셋째 동생이 태어났고, 10살 때에는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어머니께서 아기를 낳고 병원에 누워계신 것도 봤고, 갓 태어난 동생들도 봤으며, 그 동생들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우리 집에 왔던 날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던 생명은 언니인 내게 큰 행복이자 기쁨이었다. 아기를 낳고 얼굴이 하얗게 되어 병원에 누워계셨던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먼저 하셨던 일은 미역국을 커다란 솥에 끓이는 일이셨다. 그러곤 그 한 솥이 되는 미역국을 며칠 새 전부 비우시고, 또 다시 끓여 드시고 하면서 어머니는 혈색이 돌아오시고 기력을 되찾으셨다. 신기했다. 저 비린내 나는 국이 대체 뭐라고 아파보이던 어머니를 다시 일으켜줄까. 못내 정감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건강해지신 어머니 덕분에 조그마하던 아기도 덩달아 쑥쑥 자라가는 느낌이었다.
하루는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어머니께 여쭤보았다.
- 왜 어머니는 아기를 낳으면 미역국을 그렇게 많이 드세요?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특유의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로 어린 내게 조곤조곤히 설명을 해주셨다.
- 아기를 낳으면 몸에서 피가 많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새로운 깨끗한 피를 만들어주는 미역을 먹지. 미역은 우리 몸에 아주 좋은 음식이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아기를 낳으면 다들 어머니처럼 미역국을 많이 먹어.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럼 나도 커서 결혼하고 아기를 낳으면 그 땐 미역국을 먹어야하나?’, ‘나는 미역국을 못 먹는데 그럼 아기를 못 낳는 건가?’ 어린 마음에 걱정이 앞서 다시금 질문을 드렸다.
- 그럼 저는 미역을 못 먹는데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어떻게 해요 엄마?
- 괜찮아. 그 때가 되면 다 먹게 될 거야. 너도 커서 어른이 되면 먹을 수 있을 거란다.
- 아니에요. 저는 다 커도 미역을 안 먹을 거예요! 미역 대신 김을 많이 먹으면 되지 않을 까요 엄마? 비슷한 거잖아요. 저는 김은 좋아하니까 그럼 김을 먹을래요.
- 그래 그러렴. 괜찮을 거야, 우리 딸. 착하지.
그렇게 잠깐이나마 7살의 나를 절망에 빠트렸던 미역국은 다행히 김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그랬던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모르게 키가 크고 머리가 커져 번듯한 직장에서 일을 한다. 내 직업은 한식 조리사이다.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이제는 그토록 싫어하던 미역국도 자주 끓이게 되었고, 입에도 대지 않던 미역국 간을 수도 없이 봐야했다. 그런데, 아니? 먹을 만 한 것이었다. 시원하고 깊은 바다의 맛. 미역을 제외한 그 어떤 해산물이라면 귀신처럼 먹어치우던 나는, 어머니 뱃속을 떠난 27년 후인 지금에야 미역국의 맛에 눈을 떴다. 그 때보다 식재료도 훨씬 풍족한 지금은 소고기, 조개, 황태, 참치 등 다양한 재료를 곁들여 미역국을 끓여 낸다. 심지어 귀한 요리 재료인 성게 알을 넣은 미역국도 있다. 주재료는 미역이지만 어떤 재료를 함께 담아내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인 훌륭한 음식인 미역국. 어머니들이 우리를 낳고 꼭 드시던, 그래서 우리가 매년 감사한 마음으로 생일날을 기념하며 챙겨 먹는 국, 외국 사람들은 먹지 않던 해초를 정성스레 말려 저장하고 끓여 먹던 우리 민족의 식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이 훈훈한 국 한 그릇에, 나는 남다른 어머니의 모성애를, 그리고 그녀를 향한 존경을 한 국자 더 퍼서 담는다.
이제는 저도 미역국 먹을 수 있어요 어머니! 이제 나중에 아기를 낳게 되도 걱정 없으니, 제 걱정은 더시고 항상 몸 건강히 오래오래 저희 네 자매 곁에 있어주세요. 무한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