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의 고통을 준다는데 혹시 실수로 나에게 몰빵한 건 아닌지 좀 따지고 싶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전생에 혹시 나라를 팔아먹었냐고.
교회 앞쪽 십자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하느님을 향해 따졌다.
한참을 속으로 쏟아붓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앉은 교회의 긴 의자 옆자리 뒤쪽에 왠 40대의 턱수염이 덥수룩한 외국인 아저씨 한 명이 울고 있었다. 그는 내가 발을 올린 발판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나는 바로 발판에서 발을 조용히 내렸다. 그의 울음은 15분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고,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실까 싶었다.
나는 두 손을 꼭 모은채 전심을 다해 기도했다.
나 비록 종교도 없고 내가 필요할 때만 교회를 찾는 나이롱 신자이지만 오늘만큼은 전심으로 기도했다.
나의 소원을 과연 하느님은 들어주실까?
CCTV 사건 이후 호텔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소문은 빠르게 흘렀다. 덕분에 한동안 킴과 그들의 괴롭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이란 게 어디 쉽게 사라지는가.
시간이 한 달쯤 지나가자 스멀스멀 나를 향해 드리워지는 괴롭힘의 검은 그림자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카스틱 랭귀지로 내 마음을 할퀴고, 차갑게 무시하는 눈빛으로 내 영혼을 베고, 대놓고 차별하는 업무 지침으로 내 육체마저 고달프게 만들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학비 만불을 모을 때까진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지와는 다르게 조금씩 지쳐갔다.
그러다 문득 그 교회가 떠올랐다.
한인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오지잡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였다. 너무 일이 구해지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서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신이란 모든 신께 빌었다.
'제발 나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호텔에 취직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교회로 가서 기도를 한번 더 해 보기로 했다. 추가로 간절한 나의 마음을 우주로 시그널을 보내어 보기로 했다. 무슨 말이냐고?
책 <시크릿>의 내용인데 간절함을 우주로 보낸다면 그에 대한 응답을 해 준다고 적혀있었다. 처음엔 이게 뭔 개소리인가 그 깨랑까랑 할머니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간절했던 지난번 나의 취직 소원은 이루어졌다. 밑져야 본전이니 이번에도 한번 해 보기로 했다. 한 가지보다는 두 가지를 다 한다면 염원이 두 배가 될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교회의 이름도, 주소도 모른다. 하염없이 걷다가 우연히 만난 신기루 같은 교회였다. 멜버른 시티를 기억을 더듬어 3시간 넘게 찾아 헤매었다.
양쪽 새끼발가락엔 물집이 잡혔고, 뒤꿈치는 까졌다. 목은 마르고 배는 고팠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벤치에 주저앉았다. 물집이 통통하고 빨갛게 부어올라 손으로 누르면 금세 푹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냥 집에 갈까?
집에서 소원을 빌어도 들어주시지 않을까?
발도 너무 아프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산을 오를 때 산 아래에 있으면 정상이 너무도 잘 보인다고. 하지만 정상에 가까울수록 정상이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어쩌면 나는 산 정상 근처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지레 포기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간절한 마음을 우주로 보내며 다시 한번 힘을 내 보기로 했다.
운동화를 구겨 신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까진 뒤꿈치 때문에 결국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다시 교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신발 안에서 끈적이고 찝찝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새끼발가락은 선분홍빛으로 젖어 있었다. 물집이 터진 것이다. 쓰라린 발가락이 최대한 운동화에 닿지 않도록 걷다가 결국 나는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을 더 헤면 결과 드디어 찾았다. 신기루 같던 그 교회를.
거의 4시간 넘게 해대다 찾은 교회였다.
길치인 내 탓이면서 왜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는지 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한편으론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 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신발을 고쳐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햇빛이 유리창을 뚫고 알록달록한 빛들이 영롱하게 번지고 있었다. 중간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정말 존재하시나요? 신이 있다면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저는 그 호텔을 그만둘 수 없어요. 악착같이 일해서 학비를 모아야 하거든요. 거기서 일을 해야 내년에 RMIT 소속 파운데이션 과정에 들어갈 수 있어요. 지난번에 제 소원 들어주신 거 맞죠? 덕분에 저는 호텔에 취직했어요. 이대로만 간다면 1년 안에 만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염치없지만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어요. 호텔에 저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는 거 알고 계시죠? 킴, 말리나, 다이엔, 준. 이 네 사람을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저는 절대 이 호텔을 떠날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제발 저들을 어디론가 보내주세요. 제발 부탁할게요. 이렇게 필요할 때만 오는 나이롱 신자라 너무 죄송해요. 하지만 저의 간절한 소원을 꼭 좀 들어주세요. 제발요. 제발요. 제발요. 아멘"
하느님이 질릴 때까지 따지다가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어둑어둑한 저녁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내 발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묘한 위로감을 느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말 난 사실 믿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 후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소원을 빌긴 빌었지만 정말로 이루어 주실 거라고는 반신반의했는데, 소원이 진짜 이루어졌다.
이로써 나는 정말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세상이 나를 떠밀어 낼 때 손을 내어주는 작은 기적은 존재했다. 간절한 염원에 응답하는 <시크릿>의 우주의 기운도 믿기로 했다.
워킹 비자가 거의 만료된 말리나는 비자를 연장하는 것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그녀의 본국인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스튜디어스가 되고 싶어 했던 킴은 비행기를 타는 스튜디어스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작은 항공사 사무직에 취직하여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왕따 주동자 2명이 차례로 호텔을 떠나니 다이엔은 힘을 잃었다. 나를 차별하고 무시했던 일본 할배, 조식 셰프 준도 마찬가지 였다. 딱히 나를 괴롭힐 명분도 없고, 함께 괴롭힐 동료도 없었다.
킴이 퇴사하기 한 달 전 새로운 레스토랑 스탭이 들어왔는데 골 때리는 여자애였다. 그녀 덕분에 킴은 한 달간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퇴사했다. 그녀는 중국 국적에 이름은 소피. 한예슬을 닮은 고양이상의 25살 유학생이었다. 예쁜 얼굴에 비해 성격은 다소 직설적이었다. 마치 예전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극 중 한예슬 같았다.
호불호가 명확한 소피의 친절의 기준은 철저히 외모 지상주의 였다. 일적으로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킴과 다이엔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킴이 불합리한 일을 시키면 대놓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킴에게 쏘아붙이며
"네 영어 발음이 구려서 못 알아 들었잖아"
라며 면전에 대놓고 무안을 주었다.
킴은 이내 얼굴이 빨개지고 씩씩 대었지만 소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싸가지였다. 중국 사람 특유의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톤이 늘 배어 있는 소피였다.
와. 8개월 만에 나는 핵 사이다를 맛보았다. 나에게는 친절한 소피였기에 킴과 다이엔에게 싸가지 없게 대하는 행동이 인과응보라 생각했다. '나이스~ 소피~'
소피는 나의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
쓸쓸했던 8개월간의 왕따 생활도 거의 끝이 났고, 나에게도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
패션에 관심이 많던 우린 금세 친해졌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함께 카페를 가거나 쇼핑을 하며 우정을 쌓아 갔다.
킴과 말리나가 떠난 호텔 레스토랑엔 다이엔과 준만이 남았다. 어차피 준은 주방에 있으니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소피가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남자 스탭 한 명이 더 들어왔다. 27살 중국 남자 였다. 같은 중국 사람이지만 소피는 그를 싫어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옷을 촌스럽게 입고 빡빡머리에 못생겼다고. 그녀의 기준은 상당히 확고했다.
언니들의 방패가 사라진 독고다이 다이엔은 우리와 친해지려 자꾸 말을 걸었다. 다이엔에게 똑같이 갚아 주는 것도 생각을 안 한건 아니지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다이엔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나로서는 모든 걸 잊고 친해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일로 만난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