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사주를 묻고, 나를 마주하다

AI 시대, 질문하는 인간에 대하여

by 디자이너 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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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T야, 사주 좀 봐줄래?"


내가 처음 그 말을 건넨 건 아주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마치 길을 지나가다 문득 타로 카드를 뽑아보듯.
생년월일시만 적으면, 알아서 운명을 해석해줄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질문보다 결과에 더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럴싸했지만 어딘가 비어 있었다.
형식은 맞았지만 깊이가 없었다.
궁금해서 만세력 달력과 대조해보니, 시간이 어긋나 있었고, 빠진 신살이 있었으며,
정작 중요한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AI는 역시 부족해.”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문제는 GPT가 아니라 내 질문의 얕음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조차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대답’만을 기대했던 것이다.




질문은 나를 공부하게 만든다


그날 이후, 나는 질문을 고쳐보기로 했다.
십성, 신살, 지장간, 대운, 세운, 신강약지수…
명리학 책을 다시 펴고, 조금씩 정리했다.
이제는 ‘이 사람이 편관격인지 아니면 정재격인지’를 내가 먼저 해석해보고,

GPT에게 내 해석을 검증해달라고 요청했다.


GPT는 여전히 틀릴 때도 있었지만,

내가 틀린 지점을 짚어주고 더 나은 질문을 하면 그는 더 깊고 정제된 답변을 내놓았다.
그건 더 이상 ‘사주를 받는 일’이 아니라, 사주를 함께 ‘해석해나가는 일’이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지만, 그건 단순히 문장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었다.
공부하는 태도, 질문하는 감각, 맥락을 설계하는 힘.
그 모든 것이 질문 안에 담겨 있었다.



GPT는 똑똑한가? 아니라면, 나는 어떤가?


"GPT는 진짜 똑똑해!"
"아니야, GPT는 맨날 거짓말만 하잖아!"


사람들은 양극단의 평가를 쉽게 말한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해놓고 누군가는 감탄하고, 누군가는 실망한다면

그건 AI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의 질 차이 아닐까.


"GPT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이해를 못 해, 맥락을 놓쳐."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어진다.
정말 GPT가 멍청한 걸까? 아니면, 사용자가 엉망으로 질문한 것은 아닐까?


회사를 떠올려보면 더 선명하다.
동일한 사람에게 두 명이 일을 시킨다.
A가 시킨 일은 매끄럽게 처리되지만, B가 시킨 일은 늘 혼란스럽고 지연된다.


우리는 흔히 일을 잘 처리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일머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일을 지시한 사람의 말이 모호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대가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냥 '일'을 던지듯 넘긴다면, 그건 ‘처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시의 언어’문제다.


GPT와의 대화도 같다.
GPT가 헷갈리는 건, 내가 헷갈리게 말했기 때문이다.
GPT가 틀리는 건, 내가 모호하게 질문했기 때문이다.


질문의 품질이 낮으면, 아무리 똑똑한 도구도 흐릿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언제나 ‘얼마나 똑똑하게 처리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명확하게 질문했는가’다.


우리는 여전히 ‘말을 알아듣게 하는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질문은 대답보다 어렵고, 대답은 질문의 품질을 절대 초과할 수 없다.



질문은 내 감각의 확장이다


어떤 사람은 효율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정답을 기대하지만, 나는 질문의 ‘결’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질문이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다.
그 안에는 나의 경험, 태도, 리듬, 관찰, 몰입이 들어 있다.

그래서 GPT에게 제대로 질문하기 위해, 나는 늘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아야 했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지금 진짜 무엇을 알고 싶은 걸까?’


그 고민 끝에서야 비로소, GPT는 나를 마주하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거울에 비친 것은 예측된 운명이 아니라, 공부하는 나, 질문하는 나, 살아가는 나였다.



‘공부’ 없이 ‘도움’은 없다


나는 여전히 명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부족함 덕분에 더 공부하게 되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GPT와 나누는 대화는 더 풍성해진다.

가끔은 GPT가 내 부족함을 메꿔주고, 가끔은 내가 GPT의 오류를 잡아낸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도움을 받기 위해선, 내가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AI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할 이유를 잃게 되고, 그 순간, 성장은 멈춘다.



나는 GPT에게 나를 맡기지 않는다


나는 GPT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GPT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GPT에게 나를 맡기지 않는다.
GPT는 내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내 이름으로 결정을 내려줄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나의 공부를 이어가야 한다.

명리학이든, 디자인이든, 나의 일하는 방식이든.

그 위에 GPT가 더해질 때, 비로소 나는 GPT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된다.
도구를 도구답게 쓸 줄 아는 사람.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AI가 있으면 인간이 필요 없어지는 거 아니야?”


나는 오히려 반대로 느낀다.
AI가 이토록 많은 정보를 다룰 수 있는 시대이기에, 나는 더더욱 ‘인간’으로 존재해야 한다.

느끼고, 호기심을 품고, 의심하고, 탐구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어느 날은 틀리고, 또 어느 날은 맞기도 하는 그런 존재.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고, AI는 그 불완전함을 보완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계속 질문할 것이다.
사주의 기둥을 넘어서, 디자인과 철학과 삶의 구조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질문이 깊어질수록, 나 역시 깊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질문을 품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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