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믿어주는 첫 번째 사람이고 싶어요

디자인을 가르친다는 건, 마음을 보는 일

by 디자이너 야니


“툴보다 먼저, 나는 마음을 건넸다. 그리고 그 마음이 누군가의 자존감이 되었다.”


디자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09년부터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취미였던 일을 살려서 직업으로 삼게 되었고,

그때는 그저 이 일을 좋아서, 그냥 마냥 좋아서 시작했다.


창작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고,

내 손끝에서 누군가의 경험이 더 나아진다는 감각.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내가 디자인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렇게 어느덧 15년도 넘는 시간 동안 실무 디자이너로, 프리랜서로, 또 1인 웹 에이전시 대표로.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커리어를 쌓아왔다.


중간중간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고, 간헐적으로 컨설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일에 스스로를 올려놓진 않았다.
나는 실무형 디자이너였고, 교육은 그저 ‘사이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직업훈련교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쉽진 않았지만, 내가 걸어온 실무 경력과 과정들을 돌아보며 차근차근 준비했고,

결국 디자인과 개발 두 영역 모두에서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 자격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NCS 디자인·개발 과목의 확인강사 신청까지 이어졌고,

뜻밖에도 꽤 우수한 성적으로 등록되었다.


그 즈음, 강의 콘텐츠 촬영 제안이 들어왔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그 강의는 감사하게도 KDT 강의로 정식 승인을 받았다.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가르친다’는 경험은 생각보다 떨리고 낯설었지만,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나는 조금씩 서서히 교육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하고 싶은 방식이 닿는다는 것


교육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적응해가던 어느 날,

문득, 예전 동국대에서 몇 차례 특강을 한 뒤에 한 교수님이 건네주신 말이 떠올랐다.


“쭉 지켜봐왔는데, 학생들을 너무 따뜻하게 이끌어주시네요. 혹시, 교수의 길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속으로는 그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을 울렸었다.


"아, 내가 전하고 싶었던 방식이 누군가에겐 이렇게 전해졌구나."


그게 꼭 ‘직함’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믿음을 건네어 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확신이

어쩌면, 그때부터 조금씩 더 단단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마음의 연장선에서, 나는 UXUI 부트캠프의 강사이자 튜터로서
사람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음을 디자인하는 일


물론, 나도 이 일이 처음부터 편했던 건 아니다.
디자인을 잘 가르치는 것과 사람을 잘 바라보는 일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지 실무의 경험을 잘 나누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에 오는 수강생들은 툴이나 레이아웃만이 아니라,
삶의 어떤 막막한 구간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경력단절 후의 복귀, 진로에 대한 불안, 또는 사회에서의 반복된 실패.


그래서 결국 내가 건네야 할 건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말보다 먼저, 눈빛보다 더 깊은 무언가.


그걸 알아차리자, 튜터링의 결이 달라졌다.
디자인은 그대로인데, 그 안의 ‘리듬’이 바뀌기 시작했다.



1년, 그리고 200명의 마음


그렇게 강사로서의 시간이 어느덧 1년.
돌아보면 꽤 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대략 200명쯤 되는 수강생들과의 만남.


물론, 모든 학생과 깊은 관계를 맺기란 불가능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마음이 오가고, 그 안에서 내가 지켜낼 수 있는 온도는 한정적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얼굴들은 내 마음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캠프가 끝난 지 몇 달이 지나도, 늦은 밤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다가와 마음을 열고, 서툰 손길로 하나하나 화면을 만들고,
결국엔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해낸 그들.


그들은 내게 말해주었다.

“튜터님 덕분에 자존감이 생겼어요.”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우울해질때는 튜터님을 찾아와요.”
"역시, 튜터님은 마음 지킴이예요!"




처음으로 믿어준 사람


고요한 밤이면 문득 문득, 유독 기억나는 친구가 한명 있다.

튜터링 첫날, 끝까지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던 친구.
모두 함께 대화나누는 시간에도 침묵했고,
개인적으로 제출된 화면은 너무 조심스러워서 차마 코멘트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매일 출석했다.
작고 단단하게, 묵묵히, 조금씩 화면을 만들어나갔다.


나는 그 친구에게 자주 말해주었다.


“잘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누구나 어려워요. 그래도 OO님은 정말 열심히하는게 느껴져요. 꼭 성장할 수 있어요.”
"오늘도 이렇게나 많이 노력했군요! 저번 주 보다 많이 성장한게 스스로도 느껴지시죠?"
“우리는 같은 팀원이예요. 같이 답을 찾아가며 만들어가고 있잖아요.”


칭찬이라기보다는, 그 친구에게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고 싶었다.
결과가 아니라 방향을, 능력이 아니라 의지를 바라보고 싶었다.


캠프가 끝나던 날,
캠프 퇴실시간이 지났는데도, 차마 zep을 떠나지 못하던 그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울면서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저를 믿어준 사람은 튜터님이 처음이었어요.”
“튜터님을 만나게 된건, 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어요.”
"튜터님 덕분에, 저도 이제 제 자신을 믿고 용기 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순간, 나도 눈물이 맺혔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일’이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일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정말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존감지킴이라는 별명


어느 날, 수강생 중 한 명이 내게 이런 말을 전했다.

“튜터님 별명 생기셨어요! 자존감지킴이에요.”
"우울하거나, 자존감이 떨어질 땐, 소연 튜터님을 찾아가자!라는 얘기가 캠프에서 유행이예요!"
"튜터님은 우리 캠프의 심리치료사예요"


그 말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나는 멋쩍게 웃었지만, 사실 그날 밤 내 마음은 오래도록 간지럽게 물결쳤다.


자존감을 지켜주는 사람.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그렇게나 따뜻하게 감쌀 수 있었구나.
그리고 그 이름이, 어쩌면 내가 앞으로도 지켜가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툴은 변하고, 트렌드는 사라지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게 되는 순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니까.



내가 디자인하는 것들


돌이켜보면, 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내가 만드는 건 단지 ‘화면’이 아니다.

마음이 조율되는 리듬,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두려움 속에서도 손을 뻗는 용기.


그 모든 것이 디자인이고,
그 안에서 나는 ‘사람’이라는 가장 복잡하고 아름다운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학생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디자인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내가 찾은 답이 상대에게도 닿도록 설득하는 일이에요.
OO님은 이미 멋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요. 정해진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OO님만의 답을, OO님만의 방식으로 정답이 되게 하면 돼요.
우리 함께 그 방법을 찾아봐요. OO님의 디자인은 충분히 멋지고, 이미 훌륭하니까.”


그리고 그 질문이 언젠가 그들의 삶에 다시 들려오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계속 걸어간다


앞으로도 나는 디자이너로 살아갈 것이다.
실무자로서, 튜터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사람으로서.


'자존감지킴이'라는 별명은 이제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그건 나를 높이 세워주는 타이틀이 아니라,
늘 낮게, 따뜻하게, 사람을 바라보게 해주는 시선이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건넨 작은 한 마디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지키며, 그리고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묵묵히 '자존감 지킴이'로서의 길을 걸어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도가 아닌 나침반을 건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