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이 안 맞는 줄 알았다

AI 시대에 다시 철학이 궁금해진 이유

by 디자이너 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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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철학이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책을 펼치면 인간이 무엇인지 말하기도 전에,
“그게 정말 인간인가요?”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아니, 그건 그냥 말꼬리 잡기 아닌가요.
그래서 나는 철학 책을 덮었다.


아, 이건 나랑 안 맞는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철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힌다.
AI 시대, 철학과 인기 회복, 인문학 재평가 같은 기사들.
예전 같았으면 피식 웃고 넘겼을 텐데,
이번엔 이상하게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철학이 갑자기 뜬 게 아니라,

우리가 질문을 다시 잃어버렸던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말한다.

“AI가 코딩도 하고, 글도 쓰고, 요약도 하는 시대잖아.”

맞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주 드는 질문이 있다.


그럼 인간은 이제 뭘 해야 하지?


정답을 잘 맞히는 능력,
빠르게 정보를 찾는 능력,
정해진 문제를 푸는 능력은
이미 기계가 인간을 앞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질문들이 남아 있다.


이게 정말 문제인가?
왜 이걸 만들어야 하지?
이 선택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인간에게 남는 역할은 뭘까?


이 질문들은 코드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답이 아니라 시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철학이 다시 등장한다.




나는 철학이 싫었던 게 아니라,

철학 ‘하는 방식’이 싫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싫어했던 건 철학 자체가 아니었다.


정의의 정의를 파고들고,
결론 없이 반론만 쌓고,
현실과 단절된 채 논리의 완결성만 추구하는 방식.


그건 사유라기보다는
끝없는 회전 운동처럼 느껴졌다.


뭔가를 더 깊이 이해하기보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느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전혀 다른 쪽이었다.


인간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생각하는 것
기술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찰하는 것
감정, 선택, 의미 같은 애매한 것들을 나만의 언어로 풀어보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철학을 사용하고 싶었던 사람에 가까웠다.




철학은 학과가 아니라, 태도일지도 모른다


요즘 철학과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도
사실 학문 자체보다는 이 지점일 것이다.

AI가 대신해주지 못하는 영역.
문제를 정의하고, 기준을 세우고,
“왜?”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이건 전공명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에 가깝다.


그래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철학적인 사람은 될 수 있고,
철학과를 나와도
철학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질문은 사실 이것이었다.


"정말 이게 문제일까?"
"사람은 왜 이렇게 반응할까?"
"우리가 놓친 건 없을까?"


그건 철학자 흉내를 내려는 게 아니라,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닿게 되는 태도였다.




나는 여전히 철학과 체질은 아니다

그런데 철학적인 인간인 건 맞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철학과 수업을 다시 듣고 싶진 않다.

여전히 피곤할 것 같고,
여전히 말꼬리 싸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정답처럼 정의하는 게 아니라,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라는 걸.


AI가 점점 더 많은 걸 대신해주는 시대에,
사람에게 남는 건 결국
생각하는 태도, 질문하는 능력,
그리고 의미를 해석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철학이 다시 궁금해졌다.


아마 이번엔
책을 덮지 않을 것 같다.
대신, 내 방식으로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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