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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의 나

매순간 우리는 고민한다. 나이가 많든 적든. 

매 순간 왜 나여야 하느냐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다운 것과 맞닿아있다.  

내 중심을 잡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매 순간 깨닫는다. 


어릴 적부터 반복되는 평가  

중학교 입학 후, 등수로 한열로 정리되어 뒷 게시판에 붙게 되었다. 그렇게 우린 잘 알지 못하는 서로에게 이름표를 붙였고, 매번 순위가 밝혀질 때마다 이름표에 따라 집단내 평가도 달라졌다. 아무개로 인식되던 나는 자유로웠지만 1학기 말 갑작스럽게 등수가 올라 1자리 수로 진입하게 되자 가게에서 단칸방으로 사는 형편과 버무려지며 뚜렷한 이름표를 갖게 된다. 누군가의 눈에 특별한 집단으로 분류 평가된다는 것이 나에게 불쾌한 일이었다. 호의로 제공해주셨던 무료로 주시던 자습서. 아빠 가게에 한번 온 적 없던 어머니들이 차를 고친다며 방문하여 우리의 집을 기웃거리고. 결국 의원님의 결손가정을 위한 장학금까지.  가난하면 불행하고 성적도 안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 시선들이 느껴졌기 때문 일 것 같다. 그 시절 내 마음에 가난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미술학원에 가서 우리 집 돈 없으니 학원비를 깎아달라는 당당한 아이는 어디 가고. 자신을 구경하는 구경꾼들이 떠난 자리에서도 그들의 시선을 느끼는 가난한 아이만 남아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가 갑자기 그들의 시선 중심으로 분산되어 버렸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시간과 공간과 집단이 달라질 뿐 대학, 회사, 업종 분야를 달리해서도 반복되며 나타나는 일이었다. 세상에 독보적인 성과평가를 받기 위해 갖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그 평가만이 내 존재의 의미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과정보다 결과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갇히게 만들었다.  


하다, 그 자체의 즐거움 

한창 평가의 구조에 갇혀있을 때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며 나를 그리고 남편을 채찍질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개미라고 자부하며, 남편을 배짱이라고 놀렸던 내가 좀 부끄럽다. 개미는 배짱이의 삶을 평가할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멈춰 서서 돌아보며 다시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노동력을 팔지 않고, 내가 속해있던 구조에서 벗어나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평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일을 하고, 스스로 공부를 하는 그 행동 자체로 느끼는 즐거움에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모여 만들어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묻고 답해야 했다. 어느새 삶은 일과 쉼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게 되었고, 어느 때보다 평온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의 몰입감, 성취감. 그리고 그것으로 이뤄낼 삶의 의미들로 아직 완벽하지 않은 나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특정 집단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로 존재를 느끼는 것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조금 더 많이 반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온전히 그대로 

알면 다친다. 왠지 모르면 더 좋을 것 같은 그런 세상이 있다. 노화, 질병, 죽음. 왠지 어두운 검은색만이 존재할 것 같은 이런 것들이다. 예전엔 왠지 알고 나면 나도 그 중병이 걸릴 거 같아 피하던 주제들에 관심을 갖고 알아보고 있다. 알츠하이머, 감염, 통증, 정신병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병명이 이렇게도 많구나를 알게 되어 간다. 산책을 하는 노인들의 무거운 발을 옮기는 느릿한 속도를 보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다음 할 일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고, 자신을 찾는 이 없는 그 삶의 반복에 병의 통증까지 합세해온 그때의 삶이란. 둘러보는 곳마다 죽음이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온전히 그대로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나의 창업은 사실 나의 노화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생각보다 빨리, 어쩌면 늦게 언젠가는 나도 맞이할 그 순간들을 준비하고 있다. 내 세금으로 돌보아야 할 노인이 많아지는 사회문제로 보지 않고, 늙고 병든 나를 주인공으로 하면 많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서툴러졌다고 해도 마음 가득 열정을 보아주고, 실행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어떨까. 나의 노년이 어쩌면 지금보다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거 같다. 


바깥의 무더운 날씨와상관없이 우두커니 서있는 흰머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겉도는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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