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만들고, 지켜나간다는 것.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내 허약해진 몸뚱이가 서러웠다.
업무에 집중하느라 1 주일 내내 폭염 속을 휘젓고 다녔다. 그렇게 정신없이 에너지를 쏟고 나니, 아주 정직하게 몸이 응답해왔다. 면역력이 약해져, 몸속 이곳저곳이 헐고, 염증 증상이 일어났다. 그 후 2주 동안 집에서 묶여 지냈다. 이제야 좀 기력이 회복된 것 같다. [책으로] 모임 크루분의 글에서 “굿라이프”책을 소개받게 되었다. 심리학과 교수의 다양한 연구사례를 통해 듣는 행복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꾀나 흥미로웠다. 마음을 다잡기에 독서만큼 좋은 게 없었기에, 의심 없이 이 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명확하고, 동시에 그 기준이 건강하면 살아가는 데 거침이 없다. 그 기준 외의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정의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은 도덕적 완성의 정도가 아니라 한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가정들의 정확성과 품격의 문제다.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이 동일한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정, 능력과 인품은 비례한다는 가정, 설사 결과적으로 이득이 생기더라도 남을 돕는 일은 여전히 이타적이라는 가정, 나처럼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나처럼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많다는 가정이 훨씬 품격 있다.
저서 [마지막 강의]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세상을 떠난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의 랜디 포시 교수는, 실패란 “ 내가 그 일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것”이라는 가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가정 때문에 그는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죽음을 앞둔 극심한 불안과 고통 가운데서도 그가 마지막 강의를 진행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 강의가 아직 어린 자신의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기회라고 가정했기 때문이었다.
밖에 체력이 떨어지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한된 공간에 묶여있던 손발이 무한한 세계를 만났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던 몸속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아마도 계속되던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었던 듯하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매주마다 답을 해갔다. 그 날들의 나만의 답들이 반복되면서 스스로도 내가 이런 기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나를 깨닫게 된다. 내가 모르는 나를 매주 만나는 시간. 그 시간이 쌓일수록 긍정적인 가정들이 나를 둘러쌓았다. 튼튼한 나만의 성벽이 완성되어간다고 자만했다. 그리고 좀 더 속력이 붙고, 몰어서 집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임신 우울증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내가 선택한 임신이지만, 현실 속에서 만나는 체력적 제한에 발목이 잡힌 것 같았다. 아직은 진흙더미인 나의 삶의 기준들이 다시 비바람에 무너졌다. 이유 없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한참을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눈물을 흘렸다.
관계의 지리적 편중과 의식의 편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과 삶의 공간을 바꿔야 한다. 결심만으로 의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경영의 구루이자 사상적 리더인 오마에 겐이치 역시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간을 바꿀 것, 만나는 사람을 바꿀 것, 그리고 시간을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첼로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파블로 카살스는 아흔이 넘어서도 꾸준히 연습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어느 날,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아직도 그렇게 연습을 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카살스의 대답은 품격 있는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요새 실력이 느는 것 같아." (I’m beginning to notice some improvement.)
병상생활 같은 2주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다시 재정비를 할 때이다. 무너졌던 흙더미는 다시 쌓아 올리면 되고, 또 작은 성공들을 쌓아가면 된다. 자기 확신을 갖고 끝까지 기준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 들어 작은 실패들에 좀 더 의연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설사 내가 시력을 잃지 않는다 해도, 나를 봐줄 사람들이 없을 테니까, 나도 점점 눈이 멀어갈 거예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주제 사라마구 저/정영목 역 [눈먼 자들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