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안, 사회의 불안, 불안에서 발견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 혼자 그림이라는 것에 몰두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서른이 넘어서도 제작하는 일은 즐거웠다. 그런데 제작을 업으로 시작하자 그림이라는 것은 항상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완성된 제작물이 해외 워어드에 수상을 하고, 클라이언트, 상사와 회사를 만족시켜도 불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누군지도 모를 그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해 불안했던 것 같다. 평일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고, 주말까지 일을 해야 이 불안을 조금은 숨길 수 있었다. 결혼 6년이 되어서도 아이를 갖지 않는 건. 내 불안을 숨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불안을 숨기기 위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친정엄마의 암 소식은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다. 삼성역 번화가 거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다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곤 병원에서 간병을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더 이상 '나'는 없고 엄마의 휠체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운이 좋게도 깊은 암흑 같던 시간은 2달 여시 간으로 마무리되었다. 암덩어리가 지배하던 팔을 잘라내 지도 않고 용케 엄마는 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잠자던 또다른 불안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당시 암흑같던 시기는 생생히 각인되어 남게 되었다. 일, 성취, 시간, 돈에 매몰되어있던 나는, 어느새 보호자로서의 자아를 깨닫고 인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되었다. 환자 당사자였던 엄마는 수술을 마치자마자 억울하다고 했었다. 삶이 억울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억울했다. 내가 간병해드렸던 어머니는 1년 뒤 바로 외할머니를 간병했다. 그리고 지금은 친손주를 돌보고 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불과 몇년 전까지 가족이 모이면 덩실덩실 춤을 추셨었다. 노화가 되면서 정신은 말짱하셨지만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만큼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오래 더 사시라고 요양병원으로 모셨지만, 할머니는 자식들이 본인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드시던 곡기를 끊으시고 바로 1주일 뒤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모인 친척들은 요양병원의 못마땅한 처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 우리 바람과 달리, 요양병원이란 그런 곳이었다. 장례식장 손님들은 93세의 나이에 호상이라고들 했다. 이모들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90대에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60대에 암을 극복하고 친손주를 돌보는 엄마.
30대에 다시 앞날을 고민하는 불안한 나.
우리는 각자의 세대에 맞게 나이 들어가는 방식에 대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 나는 사람이 아닌 여자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 물음에 나만의 정답을 찾아가려고 한다.
이제 시작이다.
디어라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