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소식을 전할 때의 가족과 직장의 미묘한 온도차, 기분 탓일까?
5주 차, 아기집을 확인했다. 남편 고향에 가서 가족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다.
6주 차,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했다. 입덧이 시작됐다.
어버이날 맞이 남편 고향에 내려갔다.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은 서프라이즈로 알려드리려고 양성 반응의 임신테스트기와 초음파 사진, 그리고 병원에서 초진 선물로 받은 배냇저고리를 선물박스에 담아 포장했다. 시부모님, 누나를 불러 모은 뒤 선물 박스를 드렸다. 열어보시고는, 한참 동안 이게 무엇이냐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아,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구나!
어머님은 우셨고, 아버님은 춤을 추셨다.
증손주를 몹시 기다리시던 할머님은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기쁘신 마음에 놀라셨는지 다른 가족들에게 알리시지도 않고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대견하다며 이제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 몇에게는 기쁨을 나누고자 소식을 전했다. 축하해주는 감사한 마음들도 잠시, 지난 주말에 이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에 업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결국 퇴근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좀 없어졌을 때 사수인 책임님께 임신 소식을 알렸다. 덧붙여 지금 잠이 너무 많아서 제가 잠시 사라질 수 있으니 필요하실 땐 전화를 주세요...
그리고 팀장님께도 알렸다. 첫 반응이 "아이고 어떡하냐" 여서 아주 실망했지만 그래도 팀장님과 가깝게 지내니 나중에 꼭 이 서운했던 마음을 말하고 말리라.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너무 졸리고 피곤하고 지치는 것이었는데, 조금 더 버텨볼까 했던 바보 같은 생각은 갖다 버리고,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계시는 책임님과 팀장님, 두 분께 설명드리고 다음 주 수요일부터 8to3으로 퇴근 시간을 두 시간 앞당기기로 했다.
이 제도는 초기 유산의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임신기 근로자에게 나라가 보장하는 제도로, 임신 진단 시부터 12주까지 사용 가능하며, (그리고 36주 이후, 그러나 이 때는 보통 출산 휴가를 사용한다.) 일 최대 2시간까지 근로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보통 임신 진단은 4주 내지 5주에 되니까, 길어야 7~8주 사용하는 건데, 나는 6주 6일부터 사용해 6주가 못 되는 기간 동안 근로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안정기라는 12주 이후가 찾아오면 단축근무도 종료될 텐데, 질풍노도같이 변하는 내 몸도 어느 정도 적응해있을까.
나라에서 이러한 제도를 지원해준다는 것은 임신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임신하고 나면 이 제도를 십분 활용해야지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임신을 하고 보니 단축 근무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임신한 동료가 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을 것 같은 우리 조직에서,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였을지 몰라도 남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다. 그럼에도, 내 걱정과는 다르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모두들 보통의 반응을 보였다. 다행이었다.
아이를 갖고, 낳고, 육아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 부부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 결코 잘못하는 일은 아닌데 나는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왜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직장에서 승승장구해서 빨리 진급하겠다는 욕심 따윈 이미 버린 지 오래지만 내가 임산부로서 배려받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폐 같고, 또 서럽기도 한 마음이 공존한다. 그리고 올해 고과는 포기해야겠구나, 우리 조직은 상대평가니까 누군가 A를 받는다면 C를 받아야 할 사람이 생기는데,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게 바로 내가 되겠구나. 아 그래서 나는 3년 뒤 진급은 어렵겠구나. 이런 앞날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들을 시작한다. 우리 남편은 직장에서 이런 고민을 하진 않을 텐데.
계속 속이 좋지 않았다. 임신 전부터 아침을 잘 챙겨 먹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공복으로 집을 나서면 출근하는 내내 속이 불편했다. 공복이면 메스껍고, 먹으면 좀 괜찮아진다는, 아 이것이 먹덧인가?
이 날도 그랬다. 출근길에 운전하는 내내 속이 너무 울렁거려 미리 사둔 무미(無味)의 크래커, 아이비를 입에 쑤셔 넣었다. 먹기는 싫은데 그렇게라도 뭘 욱여넣어야 잠시나마 속이 편해졌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아침에 회사 카페에서 파는 주먹밥을 사 먹었다. 그나마도 다 먹지도 못했다. 속이 불편하니 두통도 찾아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먹기는 싫은데 억지로 밥을 삼켰다.
우리 회사는 공장을 끼고 있다. 나는 R&D 센터에서 근무하지만, 필요에 따라 공장 라인에 방문해 점검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같이 가기로 한 동료와 11시에 라인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현장에 나가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라고 혼자서만 마음을 먹으면서.
10시쯤 되었을까, 8시에 출근하자마자 먹은 주먹밥이 소량이었는지 공복은 아닌 것 같은데 미친듯한 메스꺼움이 찾아왔다. 자리에 앉아서 입을 틀어막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도저히 버티기가 어려워 여직원 휴게실을 찾았다. 침대에 누워서 안정을 취해보려는데 잠도 오지 않고 어떤 자세를 취해도 고통이 나아지지 않았다. 전날 온갖 술을 섞어먹은 다음날 속이 메쓰껍고 꽉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구토는 안 되는 그런 몸상태 같았다.
11시에 출발하자고 약속한 동료에게 임신 사실을 말해버리고 "저 지금 죽을 것 같아서 못 가겠어요"라고 말해버릴까, 계속 고민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 저 밑에 있는 미안함과 민폐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리로 돌아와 아이비 크래커를 욱여넣었다. 마른 흙을 씹어먹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래커를 2~3개쯤 씹고 물로 삼키고, 이내 속이 좀 편해졌다. 언제 죽을 것 같이 힘들었냐는 듯이 괜찮아졌고 (물론 숙취 같은 몸상태는 디폴트 값이다) 나는 결국 현장에 다녀왔다.
나는 커피 없이 못 사는 사람이었다. 하루에 한 잔은 기본이고, 집에서 원두를 갈아 콜드브루 원액을 내려서, 회사에 갖다 놓고 아침엔 카페 커피, 오후엔 콜드브루, 퇴근시간까지 계속 커피를 달고 살았다. 쉬는 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집에 있는 네스프레소 버츄오로 하루에 두 잔씩은 커피를 마셨다. 이런 나의 커피 습관 때문에, 이번에 버츄오 캡슐을 주문하면서 디카페인 캡슐을 잔뜩 주문했다. 새로운 디카페인 캡슐 하나를 마셔보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서 회사에 가져왔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시기가 싫어졌다. 분명, 아침에 몽롱할 때 들이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은 나에게 각성제와 같았다. 뒷골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느낌과 카페인의 각성효과. 난 그것에 중독되어 있었다. 나는 왜 이게 싫어졌을까? 결국 그 텀블러는 이 날 한 번도 뚜껑이 열리지 않았고, 내일 그대로 전부 버려졌다. 이 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커피를 단 한잔도 찾지 않았다.
사람마다 입덧은 천차만별이라지만, 내 경우에는 이랬다.
디폴트는 심한 숙취 상태이다. 나의 음주 경험에 의하면, 온갖 술을 섞어 잔뜩 마시고 만취한 다음 날 느낌과 유사하다
공복이 찾아오면 죽음뿐이다. 뭐라도 욱여넣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입맛은 없다. 내가 살 길은 마른 흙을 씹는 것 같은 크래커를 씹어 삼키는 것뿐
어쩌다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그마저도 많이 먹지 못한다.
먹으면서 속이 안 좋아지는 걸 느끼지 못하고 배가 고파 1인분을 꽉 채워 먹는 때에는 구토를 면치 못한다..
나에게 조금 도움이 되었던 것은
나의 구원자 아이비/참크래커. 무향 무미의 크래커가 도움이 된다. 물론 맛은 없고 먹기는 싫다.
레몬 사탕. 나는 리모넬리 레몬사탕을 쿠팡에서 주문해 먹었는데, 공복은 아닌 것 같고 크래커는 먹기 싫은데 속이 너무 느글거릴 때 하나씩 먹는다. 보통의 레몬사탕은 아닌 것 같은 극강의 신맛이 입덧에 매몰된 정신을 잠시 다른 데로 보내버린다.
입덧은 보통 4~6주 차에 시작되어 10주 차에 절정을 찍고 12~16주에 사라진다. 사람에 따라 분만 시까지 입덧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입덧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hCG가 분비되는 양에 비례해 증상이 심해지고, 해당 호르몬 농도가 떨어지면 증상이 나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의학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나와 같은 케이스를 먹덧, 토를 하면 토덧, 본인 침이 역해서 침을 못 삼키는 사람은 침덧, 양치를 할 때 역해지면 양치덧 등등 증상도 천차만별이다. 나는 냄새만 맡아도 토하고, 물도 입에 못 대는 사람들보다는 증상이 가벼워 감사할 일이지만, 순간 메스꺼움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올 때면 너무나 고통스럽다. 심지어는 앞으로의 임신기간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입덧 기간이 끝나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거고, 배가 끝이 없이 불러오고 나면 지옥과 같은 분만의 고통을 느낄 때가 오겠지.
이번 주 토요일에 진료 예약이 있다. 7주 차, 써니의 심장소리를 듣는 날이다.
심장소리를 들으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눈물 흘린다던데, 나도 그럴까? 아주 작은 아기의 심장은 초음파로 보면 반짝거리며 빠르게 뛴다던데, 넌 역시 보석 같은 아이가 분명해. 아니 보석보다 더 소중한 아이야.
엄마는 비록 널 품어서 몸이 바뀌고 일상이 힘들어졌지만, 아직까진 견딜만해. 너만 건강히 커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버티는 건 지금도 뛰고 있을 써니의 심장 소리와 나의 정신적 지주 남편 때문이다. 막막하지만 가보자 달이 꽉 차는 만삭까지!